민족의 암흑기인 일제시대 1927년 4월 1일 일단의 청년 신자들이 뜻을 모아 창간한 가톨릭신문은 그후 근현대사의 격랑을 교회와 민족과 함께 헤쳐왔다. 세번째 희년을 맞은 가톨릭신문은 이제 감사의 마음으로 역사를 돌아보고, 열정으로 현재를 살아가며, 희망과 기대로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신문 75년 역사를 정리하는 자리로서 역사전시회를 개최한다. 4월 10일부터 22일까지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 1층에서 개최되는 「교회와 함께, 민족과 함께 - 가톨릭신문 창간 75주년 역사전」은 그야말로 복음과 민족이 함께 어우러진 우리 근현대사를 한 눈에 돌아보는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 전시회 개요
교회와 민족의 75년 역사 한눈에
세상 속에서 세상의 구원을 향해 세상과 함께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 가톨릭교회는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통과 환희,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해왔다. 한국교회는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함께 체험했으며 가톨릭신문의 75년 역사 역시 교회와 민족과 함께 한 순례의 역정이었다.역사의 현장인 명동성당 옆 가톨릭회관 1층 평화화랑에 마련된 전시장에는 교회와 신문의 역사를 담은 다양한 코너들이 마련돼 있다.
활자 제호 변천
- 신문으로 보는 교회사 : 창간 당시부터 지금까지 가톨릭신문 안에 나타난 교회와 민족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 사진으로 보는 교회사 : 역사적인 순간과 그 현장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된다.
- 활자체, 제호 및 판형 변천사 : 인쇄술의 발달과 시대적, 사회적 변천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온 활자체, 제호와 판형의 변천사를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쥐약 광고
- 광고 변천사 : 광고는 시대상을 반영한다. 쥐약 광고에서부터 기업 이미지 광고까지 신문에 게재된 광고의 변천을 통해 시대를 들여다본다.
- 세계의 가톨릭 신문 : 전세계 가톨릭교회에서 펴내고 있는 유수한 가톨릭 언론들을 살펴볼 수 있다.
- 국내 타종교 신문 : 각 종교계에서 펴내고 있는 종교 신문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모았다.
김추기경 보도증
- 취재 및 편집 장비 : 김수환 추기경의 보도증을 비롯해 취재수첩과 카메라 등 관련 장비들이 전시된다.
- 신문 제작 과정 : 취재 기획부터 편집, 인쇄, 발송까지 신문 제작에 관련된 일체의 공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1. 신문으로 보는 교회사, 사진으로 보는 교회사
(1) 천주교회보 창간(1927. 4. 1)
가톨릭신문의 전신으로서 1927년 4월1일자로 일단의 청년들이 월간지로 펴낸 「천주교회보」는 거의 만용(?)에 가까운 열성이었다.
(2) 광복(1945. 8. 15)
광복의 날은 마침 「성모승천대축일」이었다. 「천주교회보」도 4월 1일 복간됐다.
(3) 한국전쟁(1950. 6. 25)
한국전쟁은 교회 전반에 큰 타격을 주었고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 지도급 신자들을 잃었다.
(4) 교계제도 설정(1962. 3. 10)
3개 관구 11개 교구로 구성된 한국교회의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 1962년 3월 10일 3개 관구 11개 교구로 구성된 한구교회의 교계제도가 설정됐다.
(5)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 10. 11)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막했다. 『내적 쇄신과 일치는 공의회의 두 큰 「모티브」였으며 한국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6) 추기경 탄생(1969. 3. 28)
한국 최초로 서울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가 추기경에 임명되고 4월 28일 바티칸에서 서임식이 거행됐다.
(7) 추기경 시국 성명(1972. 8. 9)
주교회의 의장 김수환 추기경은 시국성명을 통해 비상사태 선포와 변칙통과된 보위법의 철회를 주장했다. 가톨릭신문은 정부의 탄압으로 성명서 전문을 싣는 대신 「예수 십자가에 처형되다」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어야 했다.
(8) 지학순 주교 구속(1974. 8. 12)
지학순 주교가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돼 구속, 15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9) 신자수 100만 돌파(1974. 12. 31)
사회 정의 구현은 교세 증가에도 기여해 마침내 신자수 100만명을 돌파했다.
(10) 광주사태 발발(1980. 5)
교회는 광주와 광주대교구의 참담한 비극에 예언자적 발언을 하지 못했다.
(11) 200주년 신앙대회(1984. 5)
한국을 처음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6일 여의도광장에서 기념대회와 103위 시성식을 가졌다. 아울러 200주년 기념 전국 사목회의를 통해 12개 의안을 확정했다.
(12) 지학순 주교 평양방문(1985. 9. 22)
남북한 고향 방문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지학순 주교는 처음으로 북한 땅에서 감격적인 미사를 봉헌했다.
(13) 서울 세계 성체대회(1989. 10. 4)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제44차 세계 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14) 박종철씨 고문치사(1987. 1)
고문치사사건은 온 국민을 분노에 휩싸이게 했다. 이어 정부는 「4?3 호헌조치」를 선언했다. 5월 정의구현사제단은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됐음을 폭로했고 범국민적 저항이 이어졌다.
(15) 6.29 선언(1987. 6. 29)
정부는 결국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임으로써 빛이 어둠을 이겼다.
(16)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1992. 4)
낙태를 사실상 합법화하는 형법 개정안 제135조의 입법 예고에 따라 범교회적인 반대 운동이 펼쳐졌다.
(17) 안중근 심포지엄(1993. 8. 21)
김수환 추기경은 「안중근의 신앙과 민족운동」 심포지엄에서 일제시대 제도교회로부터 단죄를 받았던 안중근에 대해 공개적인 사과를 표명, 의거 84년만에 그 정당성을 인정했다.
(18) 남북 통일 세미나(1995. 10. 30)
서울대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역사적인 남북 신자 첫 통일 세미나를 미국 뉴저지주 한 호텔에서 개최했다.
(19) 북한 돕기 국수나누기(1996. 8. 15)
기아로 고통받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한 국수나누기 운동이 시작돼 한달만에 무려 45억원의 성금을 약정 받았다.
(20) IMF 경제위기(1997)
97년말 한국은 경제위기에 빠지고 모두가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왔다. 교회는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고 김추기경을 비롯한 종교계 지도자 등에 의해 제안된 금모으기 운동이 범국민적인 호응을 얻었다.
(21) 대희년 개막(1999. 12. 24)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성문을 열어 대희년을 개막했다. 한국교회는 「새날 새삶」 운동을 펼쳐 대희년 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22) 남북 정상 회담(2000. 6)
분단 55년만에 남북 정상이 만나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23) 이산 가족 상봉(2000. 8)
분단 이후 두 번째로 이뤄진 이산 가족 상봉에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가 눈물바다를 이뤘다.
■ 신문 제작 과정
마감시간 임박하면 긴장감이 감돌고…
신문 제작 과정은 크게 기획, 취재, 기사 작성, 편집, 인쇄, 발송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기자들이 제출한 취재계획서를 바탕으로 기획회의를 거쳐 취재할 내용을 취사선택하고 담당자를 할당한다. 물론 각자 자신의 취재처를 관리하면서 한 가지라도 누락하는 기사가 없도록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취재 계획이 나오면 취재 기자들은 인터뷰, 탐방, 조사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좋은 기사를 취재하기 위해 사목 현장을 뛰게 된다.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사무실은 고요한 적막 속에 오직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울린다. 편집기자들은 취재기자들을 닥달하면서 마감을 독촉하고 데스크는 하나 하나 기사를 검토하면서 호통을 치게 된다.
전국 각 기자들의 기사는 편집국으로 모아진다. 기사 송고는 전자메일을 통해서 이뤄지고 웬만한 사진 역시 디지털화해서 메일로 보내진다. 데스크를 거쳐 분류된 기사들은 각 면 담당 편집자들에게 주어지고 편집자들은 눈이 빠지게 매킨토시 컴퓨터를 들여다보며 보기 좋고 읽기 좋게 편집을 하게 된다.
완성된 편집면은 인쇄본부로 전송돼 필름으로 현상된다. 필름은 알루미늄 평판으로 제작되고 윤전기에 설치해 시간당 최고 14만부의 신문들이 쏟아진다.
▲ 취재 및 편집 마감 시간을 앞두고 있는 편집국 전경.
2. 신문 제호 변천사
다양한 이유로 9차례 변화
가톨릭신문의 제호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만큼이나 다양한 변화를 보여왔다. 신문판형의 변화에 따라, 연륜이 쌓여감에 따라, 정부의 방침에 따라, 월간에서 주간으로 변화하면서, 시대적 감각의 변화 등에 맞춰 9차례에 걸쳐 변화를 보였다.
특히 1953년도에 사용된 「가톨릭新報」는 당시까지 대구교구 청년회 회보라는 소극적이고 폐쇄적인 태도를 벗어나, 시대적 요구에 더욱 충실하려는 의지를 담은 제호였다. 그러나 이듬해 일간지 외에는 「신문」이나 「신보」라는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정부 방침에 따라 「가톨릭時報」로 바꿔야 했었고, 이것이 1980년까지 26년이상 사용됨으로써 아직도 나이 많으신 장기 독자들에게는 가톨릭신문이 「가톨릭시보」로 각인되어 있다.
▲ 신문 제호 변천사
3. 광고 변천사
광고가 본격적으로 신문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1920년대에는 양화점, 이발관, 양복점, 시계점 등의 광고가 있었으나 그 수가 매우 적었다. 1940년대 들어서 사진관 미싱 의원 약국 양복점 이용원 식당 등의 광고가 있었지만 여전히 그 수가 많지 않았다. 1950년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성탄 축하 광고, 성물이나 서적 광고 등이 실리기 시작했고 1959년 10월 11일에 처음으로 약 광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에는 가톨릭 관련 잡지나 서적 광고들이 많았는데 서양에서 들어온 대작 종교 영화도 많이 등장했다. 벤허, 십계, 아담과 이브, 성 베드루, 천지 창조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또 생필품인 비누 광고나 라디오 광고 등도 나오기 시작한다. 최초의 화장품 광고가 1960년에 나타났고 모기향 광고나 특히 쥐약 광고는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매우 흥미로운 것이었다. 기업 이미지 광고로 신진자동차 광고가 1969년 10월에 처음 선보였다.
1970년대 초기에는 병원이나 약국 광고, 여행사 광고가 자주 등장했고 서양 영화 뿐만 아니라 천주교와 관련된 국산 영화도 나오기 시작한다. 위대한 생애, 새남터의 북소리, 목소리, 쥬리아와 도구가와 이에야스 등이다.
70년대 후반기부터는 경제 개발 붐을 타고 아파트 분양 광고도 자주 등장했다. 특히 1978년에는 최초의 전면광고인 아파트 광고가 실렸다.
경제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는 80년대에는 전자제품 광고와 자동차 광고, 해외 성지순례 광고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90년대 전반기에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 사치품 광고들이 등장하고 건강을 위한 정수기, 다이어트, 건강식품 등의 광고가 자주 등장한다. 사실상 90년대 들어서부터는 광고들이 매우 다양해 생활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련된 광고들이 게재되고 있다.
▲ 1968년 9월 22일자에 실린 쥐약 광고와 62년 2월 18일자 영화 광고
4. 세계의 가톨릭 신문 , 국내 타종교 신문
각국 신문 현지서 제공받아
전세계 교회는 각자의 여건에 따라 적절한 홍보수단을 운영하면서 복음 선포를 위한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뿌리깊은 그리스도교 전통을 지닌 아메리카와 유럽의 교회들은 오랜 전통을 지닌 언론매체들을 운영하고 있으며 교회내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발행되는 일간지 아베니레지나 교황청에서 1861년에 창간한 로세르바토레 로마노지, 영국의 가톨릭헤럴드, 미국의 더 타이딩지 등은 유서깊은 가톨릭계 신문이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역시 각국 교회와 교구별로 신문 라디오 TV 등 언론매체들을 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각국의 대표적인 신문들을 현지로부터 제공받아 전시하고 있다.
한편 국내의 타종교에서도 가톨릭교회에 버금가는 수준의 언론매체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특히 개신교의 경우에는 교단의 종류 만큼이나 다양한 신문들이 발행되고 있으며 불교에서도 여러 종의 신문들을 발행한다. 그외에 원불교, 천도교 등의 종단에서도 신문을 발행하고 있으나 부수나 면수, 종류면에서 가톨릭, 개신교, 불교 등보다는 다소간 미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