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낯도 익을 만 하건만 마을길을 접어들며 만나는 마을 사람들이 키우는 강아지 무리 중에는 여전히 날 보며 짖어대는 녀석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모습조차 늘 반갑고 정겨운 풍경 속의 하나일 뿐이다.
거처를 이 곳으로 옮긴 지 10여년, 교구장 자리를 물러나 안동교구를 떠난 후 행주산성이 바라다 보이는 행주외동에 자리잡은 한국에서의 내 삶은 이제 두 해만 지나면 꼭 50년을 채우게 된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고있는 이들 만큼이나 이 땅 사람이 되어버린 자신을 문득문득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너무나 보잘것없고 평범하기만한 내 삶을 누구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게 부끄럽기만 한데 나를 아는 사람, 또 나를 모르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말에 용기를 내어본다.
주위에서 피정 요청이 끊이지 않는 편이어서 한달 평균 한두 번 피정 지도를 나가게 되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나 개인사에 관심이 많은가 보다. 대개 간단한 말로 대답을 대신하지만 이런 부분까지 그들의 삶에 도움이 될 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태어난 곳은 프랑스의 오를레앙, 성녀 잔다르크로 인해 더 유명한 바로 그곳이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100여㎞ 떨어진 오를레앙교구에서도 한갓진 시골 농촌에서 태어난 나는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았다.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세례명은 。㎎뭄さ덧', 。㎞킵 났다。 。㏈섭 받은 사람。㎱繭 뜻이다.
위로 형과 누이 2명이 있고 아래로는 남동생 하나가 있다. 또 부모를 일찍 여읜 사촌여동생 2명이 함께 살게 돼 형제는 모두 7남매였던 셈이다. 살기 어려운 가난한 농촌인데다 가족까지 많다보니 늘 배고팠던 기억이 많았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보면 지워지지 않는 기억 가운데 하나가 부모님의 열심한 신앙생활 모습이다. 대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침 일찍 들로 나가 밤이 늦어서야 돌아오시는 부모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토요일 오후면 어김없이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으시고 나란히 성당을 찾으셨다. 평생 한번도 거른 적이 없으셨던 고해성사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일요일 아침, 우리 형제들은 예외없이 아버지의 기분 좋은 노랫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주일을 그 어떤 날보다 소중히 여기신 아버지는 가족 모두가 기쁘게 주일을 맞고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노래를 부르며 우리를 깨우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부터 차례로 주방에 물을 떠다가 정성 들여 목욕을 하고 주일날에만 입는 。㎲聆臼伽'으로 갈아입고 성당을 향했었다.
평생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 회원으로 활동하셨던 아버지는 지금 생각에도 하느님나라를 위해 열성적으로 사셨던 분으로 떠오른다. 당신의 가난함을 살피기 보다 이웃의 어려움을 먼저 돌보시며 아버지로서 보여줄 수 있는 훌륭한 모범을 몸소 보여주셨다. 첫영성체를 준비하던 때, 매일 저녁 공책에다 날짜별로 우리 형제들의 기도와 주님을 위한 희생, 성사 등을 기록하시며 신앙생활에 용기를 주시던 자상한 모습도 잊을 수 없는 기억 가운데 하나다.
이런 아름다운 신앙생활의 추억은 이후의 삶에서도 나를 믿음으로 충만하고 기쁨에 넘치게 하는 원동력이 됐던 것 같다.
내게 성소가 언제 어떻게 다가왔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신앙적으로 충만한 가정환경 속에서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성소를 느끼게 됐던 것만은 틀림이 없다. 또 아버지의 형인 큰아버지가 신부여서 자주 오가며 사제생활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도 성소를 택하는데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본당의 보좌신부님이 사제의 길을 권고해주셔서 당시 들어보지도 못했던 한국과의 인연의 씨앗은 뿌려지기 시작했던 셈이다.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7남매 가운데 성소에 뜻을 밝힌 나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유일하게 중등학교를 진학하게 됐다. 신학교에 가기 위한 기본적인 소양을 충실히 닦으라는 부모님과 형제들의 배려 때문이었다.
열한 살 나던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져 고향을 등지고 피난길에 나섰던 기억, 독일군의 폭격으로 두려움에 밤을 지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중·고등학교 시절 거의 내내 전쟁이 계속되는 바람에 늘 먹을 것이 부족한데다 폭격이 있을 때면 지하실에 숨어 먹고 자며 버텨야 했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에게 전쟁은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학교는 이미 전쟁 초기에 비행기의 폭격으로 폐허가 돼 늘 가건물에서 수업을 받아야 했다.
집안의 교육적 분위기 때문이어서인지 다른 형제들도 야간학교와 학원 등을 다니며 자신의 삶에 필요한 전문지식을 쌓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의 길을 위해 자신의 삶의 일부를 기꺼이 희생해준 형제들에게 늘 감사한 마음이다. 한 사람의 사제를 위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기도가 필요하다는 말은 내게도 해당되는 셈이다. 그래서 사제는 그 누구보다 하느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존재로 위치지어진 사람이라는 생각은 줄곧 내 삶의 주춧돌이 되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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