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바티칸공의회 참석 등 보편교회 및 한국교회의 변혁 성장기에 선교사 주교로서 그 흐름의 변화 추이를 지켜볼 수 있었던 나주교는 「한국에서의 선교사 생활은 하느님 섭리였고 40여년 동안 한국 신자들과 함께 하느님 종으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큰 은혜였다」고 교구장 은퇴의 변을 밝혔다.
『61년 주교서품 후 62년부터 65년까지 한국주교단 일원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 교회 변화 쇄신의 커다란 물줄기가 되었던 현장에 함께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후 바티칸공의회 결정에 의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모습을 지켜본 것도 기쁨이었습니다』
인터뷰가 시작되면서 40여년 한국교회 역사가 고스란히 펼쳐지는 듯한 느낌일 만큼 나주교는 날짜까지 기억해 내며 그간의 의미있고 뜻 있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 냈다.
주교서품 받은 다음달, 마침 61년 추계 주교회의가 열려 새내기 주교로 참석했던 첫 주교회의 모습을 회고한 나주교는 『그때 11명 참석 주교 중 한국인 주교는 노기남 대주교, 서정길 대주교 등 네명에 불과했고 그외는 모두 선교사 주교였다』며 『방인 주교, 성직자가 수천명으로 늘어난 요즘의 한국교회 모습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고 밝혔다.
인천교구장을 떠나는 심정은 「그저 교구 사제단, 수도자, 신자들에게 감사드린다」는 것. 『사제단, 수도자, 평신도들 모두 너무 열심히 성심껏 도움을 주어서 어려워만 보이던 일들을 순조롭게 해결해 갈 수 있었다』는 나주교는 『교구민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혼자서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교구장 재직 중 기억에 남는 일들을 꼽아달라고 부탁하자 「신학교건립, 시노드개최, 부교구장 임명」등과 함께 「본당 인사발령에 대한 사제단의 순명」을 들었다.
나주교는 『본당 인사이동을 시행할 때마다 모든 사제들이 교구 결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고맙고 감사했다』면서 『특히 신설 본당 등 여건이 어려운 본당으로 전출을 명했음에도 기꺼이 수락하는 자세는 계속 기억하고 싶은 부분이다』고 말했다.
「신학교 건립과 시노드 개최는 후원자들과 수고한 분들에게 정말 눈을 감는 순간까지 감사인사를 전해야 할만큼 그분들의 노력이 컸다」고 강조했다.
『신학교 건립은 재정적 어려움도 많았고 반대하는 이들도 있었기에 힘들었던 업무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한편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협조가 있어서 무사히 축복식까지 마친 것 같습니다. 그분들의 도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주교는 『시노드 역시 처음에 모든 것이 아득하게만 느껴졌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우려했었지만 폐막식과 함께 최종문서를 발행했고 시노드 결과물들이 하나씩 이행되고 있는 모습은 은혜롭다』고 평가했다.
시노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최기산 주교가 부교구장으로 임명된 것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시노드 정신이 후임 교구장에게 그대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주교는 또한 재임 중 후임 주교가 탄생함으로써 2년여 동안 교구 일을 함께 의논하며 교구장 승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감사함을 드러냈다.
『후임 최기산 주교는 영성과 성서에 관심이 많은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교구 사목국장 일을 하며 대학원 공부를 했고, 미국에서는 교포사목을 병행하면서 영성신학을 공부하는 등 사제로서, 학자로서도 열심한 분입니다』
그런 면에서 매우 마음 든든함을 느끼며 교구장직을 떠날 수 있을 것 같다는 부언이다.
힘들었던 일이라면 『40여년 동안 거의 재정적 고민에 머리를 써야 했던 것』이라고 밝힌다. 『신학교 건립, 시노드 개최 등 여러 사업이 시작되면 항상 재정의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는 나주교는 『그러나 항상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어려움이 별탈없이 극복되는 상황을 경험했다』며 『하느님 사업은 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실감했다』고 들려줬다.
교구장으로써 느낀 인천교구 저력에 대해서는 『교구에서 특별 강좌 등이 마련됐을 때 연평도 등 거리가 먼 지역에서도 신자들이 참여할 만큼 교육에 대한 열의가 높고 특히 노동자들이 많은 지역적 특성에 따라 노동자들과 함께 하고자 하는 연대의식, 정의평화 활동에 대한 적극성 등이 남다른 것 같다』고 평했다. 레지오마리애, 꾸르실료, 성령기도회 등 신심단체 활동의 내실있는 모습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단다.
한 교구의 수장으로서, 40여개 성상 동안 사목활동의 사령탑을 맡았던 나주교는 그만큼 한국교회에 대한 고언도 서슴지 않는다.
『성직자들에게서 영성, 기도보다 행동에 치중하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습니다. 지나친 행동주의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행동을 우선하다 보니 기도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죠. 이런 경우는 심히 우려가 됩니다. 성직자 본연의 업무 외의 것은 신자들에게 맡기고 기도를 더 많이 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쉬는교우, 행불자 양산」 「주일학교 학생수 감소」 등에 대해서도 걱정스런 의견을 표시한 나주교는 『신자재교육도 중요하지만 영세 전 예비신자 교육이 충실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적어도 1년 정도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이 우러나올 수 있도록 교회가 배려해야 합니다. 예비신자 교육을 올바로 받지 못하면 쉽게 냉담하고 교회를 떠날 소지가 많아집니다』.
나주교는 주일학교 문제와 관련, 『초 중 고등부로 갈수록 주일학교 출석률이 감소하는 현재 주일학교 추세로는 「청소년은 교회의 미래」라는 비전을 찾기 힘들다』고 소신을 밝힌다. 『앞으로 주5일 근무제가 시행되면 주일미사에 대한 의식이 더 희박해지고 주일학교 역시 출석률이 감소할 수 있다』는 것. 『신앙교육 보다 수능시험 등 학교교육을 우선시 하는 부모들 의식이 전환되지 않으면 주일학교 문제는 돌파구를 찾기 힘들 것』이라는 나주교의 견해였다.
65년 인천 명예시민증을 취득한 나주교는 그만큼 한국인에 대한 사랑도 각별하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두손을 모아 물건을 건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는 나주교는 『마음 씀씀이가 넓은 것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고 말했다. 특유(?)의 열정적인 모습은 신앙에도 그대로 배어 나오는 것 같다는 의견이다.
나주교는 4월 25일 공식적으로 교구장직을 놓게 되면 5월 중순경 미국으로 떠날 계획이다.
『메리놀회 회헌은 은퇴 후 「메리놀회본부」「선교지」「가족거주지」 중에서 하나를 택해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는 가족들이 남아있는 메사추세츠주 로렌스시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지역본당 및 보스턴 교구 일도 도울 것입니다 』
신설본당이 늘어나는 한국과 달리 나주교 고향에는 원래 세곳이었던 성당이 현재 한곳 뿐이다. 신자수도 적고 성소자 부족으로 성직자 역시 그 수가 충분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주교는 지역본당의 사목 활동에 적으나마 보탬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메리놀회 본부의 후원회원 프로그램등도 협조할 계획이다.
『기회가 되면 한국에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고 말을 맺은 나주교는 교구민들에 대한 당부의 말을 청하자 『자기 주변의 쉬는 교우, 행불자 등에 보다 많은 관심을 쏟아달라』는 부탁을 전했다.
▲ 인천가톨릭대학교 축복식(2000년 9월 20일)에서 나길모 주교가 성수를 뿌리며 축복하고 있다.
=나길모 주교 약력=
▲본명 : 윌리암 존 멕나호튼(William John McNaugton)
▲1926년 12월 7일 : 미국 메사츄세츠주 로렌스시 출생
▲1953년 6월 4일 : 미국 뉴욕주 메리놀 대신학교 신학원 졸업 및 종교 교육 석사학위 취득
▲1953년 6월 13일 : 사제서품
▲1954년 7월 22일 : 한국(부산)도착
▲1954~55년 : 충북 장호원본당 보좌
▲1955~57년 : 청주 북문로본당 주임
▲1958~59년 : 청주교구 참사
▲1959~60년 : 청주교구 부감목
▲1961년 6월 6일 : 인천교구장 피명
▲1961년 8월 24일 : 주교서품
▲1962~1965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참석
▲1965년 6월 1일 : 인천 명예시민증 취득
▲1964년~현재 : 학교법인 인천가톨릭교육재단, 인천가톨릭학원 이사장
▲1996년~현재 : 재단법인 인천가톨릭청소년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