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의 기대를 안고 입학한 중학교, 부모님은 어려운 살림에도 첫 입학금을 손수 마련해주셨다. 나도 주위의 기대와 희생에 보답하려 했음인지 이후 중·고등학교 시절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교회가 운영하는 인문계학교였는데 입학 후부터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 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의 이념을 접하고 이에 따라 활동을 했다. 「관찰」 「판단」 「실천」이라는 3단계에 입각해 세상 속에 임하도록 한 노동청년회의 가르침은 이후 모든 일을 주님의 눈으로 보고, 예수님과 한마음되어 판단하고, 예수님의 손발이 되어 실천하는 삶으로 이끌어주는 밑거름이 됐던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이미 이런 교육을 받았다니 지금 생각해봐도 나는 참 복이 많은 것 같다. 그러고 보면 신앙으로 충만한 가정에서부터 배움의 현장이었던 학교, 그간 몸담아 왔던 각종 삶의 현장 등 줄곧 복된 환경 속에서 하느님의 이끄심을 체험했던 것 같다.
중등학교 시절 내내 학교에서는 영어를 비롯한 라틴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를 가르쳤는데 나는 언어에 소질이 있었는지 각 나라말들의 기초 뿐 아니라 깊이 있는 내용에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한국과는 교육체계가 달라 각급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국가에서 치르는 「국가시험」을 합격해야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나는 중등학교과정을 어렵지 않게 이수하며 고2 때 치른 첫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러나 고3을 정리하며 그 해 여름에 치른 시험은 너무 자신했던 때문인지 미끄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여름방학을 마치고 또 한번의 기회가 주어져 대학입학 자격을 딸 수 있었다.
내가 가고자 마음먹고 있던 교구 대신학교는 굳이 대학입학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훌륭한 사제가 되길 바라는 가족들의 도움으로 나는 좋은 교육과정을 거쳐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이다. 이 때 나이 19살이었다. 「술피시안」 신부들이 맡고 있던 오를레앙 대신학교는 생각했던 이상으로 교육환경이 좋았다. 「술피시안」은 사제 양성을 성소로 받아들여 신학생에게 영적 지도를 할 수 있는 특별한 훈련을 받은 사제들의 모임이다. 당시 신학교의 술피시안 신부들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훨씬 이전에 벌써 이 공의회의 정신을 가르치고 있을 정도로 높은 학문적 세계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사회는 공산당의 활동으로 노동자 대중들이 교회로부터 많이 떨어져 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힘든 노동을 하는 이들 가운데서는 교회와 사제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교회에 대한 이같은 부정적인 인식을 불식시키려는 노력이 이어졌는데 이것이 곧 「노동사제단체」의 출현이다. 신부들 가운데는 바오로사도처럼 주위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삶을 해결하며 복음을 전하고자하는 뜻있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 노동사제들은 교회와 관계가 끊긴 노동자들을 다시 이어주기 위해 힘든 삶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제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노동자들과 사는 신부들도 있었다. 나도 일반사목을 할 신부는 많을 것이라는 판단에 노동사제로서의 길을 염두에 두게 됐다. 그래서 교구 신학교를 떠나 노동사제를 양성하는 신학교로 옮기려 했으나 학장 신부의 만류로 교구에 머물러 있게 됐다.
신학교 2년을 마치면 삭발례를 하게 돼있었는데 이는 세속의 삶을 포기한다는 뜻과 함께 교구 소속 사제가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나는 삭발례를 하고 나면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간의 삶을 정리해보고 앞날을 가다듬어보기 위해 군에 입대하기로 했다.
1년이라는 군 생활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제2차 세계대전 후라 유엔군 소속으로 독일에서 군 생활을 하게 됐다. 신학교시절을 포함해 줄곧 배고팠던 삶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됐기에 나는 이 기간 동안 영적인 부분에서는 물론 육적인 면에서도 풍요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군 생활을 즐기다시피 하는 내게 사관학교를 가라는 권고도 있었지만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제의 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말단사병에서 하사관으로 꾸준히 승진한 나는 독일에서도 매일 성당을 찾아 미사를 드렸다. 이 때 같은 부대에서 만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생이 내 삶을 바꿔 놓을 줄이야. 군 생활 말미에 한국전쟁이 터졌다. 동료들 가운데는 참전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나는 신학수업을 계속하기 위해 7월에 전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한국 전황에 늘 관심을 가졌던 기억이 난다.
군 생활을 통해 나는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노동사제로 살겠다는 생각은 선교사로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으로 어느덧 변해 있었다. 이런 내 생각에 학장신부님도 쾌히 찬성하셨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신학교 3학년때부터 파리외방전교회로 입적해 새로운 삶을 위한 준비에 들어가게 됐다.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는 교구 신학교에 비해 신학생들의 정신이 훨씬 진취적이고 좋았다. 「순교전문대학」으로 불리기도 했던 신학교의 교수신부들은 하나같이 전교지방을 다녀온 분들이어서 이들을 통해 내 가슴속에서도 선교에 대한 열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장렬한 순교의 역사를 지닌 한국과 내가 서로에게 한발한발 다가서도록 섭리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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