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논문 주제는 「비그리스도인의 구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전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그간 거쳐온 학문적 배경과 성과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 1953년 프랑스 오를레앙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고 있는 두봉 주교(맨 오른쪽)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교통편이라곤 오로지 배, 얼마나 시간이 걸릴 지도 모를 배에 몸을 실었다. 마르세이유를 출항한 배는 지중해와 홍해를 거쳐 이집트, 스리랑카, 콜롬보, 싱가포르, 베트남 사이공, 홍콩 등 세계의 교통 요지를 두루 거쳐 한달 만에 일본의 요코하마에 닿았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 일본에서 한국을 드나드는 배라곤 화물선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화물선편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배를 구하러 다니느라 적잖은 시간을 보내고서야 3주만에 화물선에 오를 수 있었다. 드디어 눈앞에 다가온 한국, 그러나 화물선도 이번 여정을 쉽지 않게 만들었다. 요코하마를 떠난 배가 한국에 처음 닿은 곳은 마산, 여기서 배는 부산을 거쳐 다시 기수를 오키나와로 돌렸다. 여기를 둘러서야 나는 프랑스를 떠난 지 두달 반만인 12월 19일 인천항에 도착해 꿈에도 그리던 한국땅을 밟을 수 있었다.
첫발을 디딘 한국의 첫 인상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1년 반이 지났건만 상상하기 힘든 빈곤과 그것이 드리우는 고통의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성한 건물이라곤 거의 없는 가운데 사람들은 폐허가 된 건물의 지하나 임시천막에서 추운 겨울을 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첫 생활은 지금의 서울 용산 성심여자고등학교 터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거처에서 시작했다. 전화(戰禍)가 채 가시지 않아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힘들었지만 전교회 신부들은 유엔군으로 와있던 프랑스와 벨기에 군부대의 도움으로 큰 어려움은 덜 수 있었다. 이 곳에 6개월 가량을 머물며 한국어를 공부하려 했으나 체계적으로 한국어를 가르칠 학교도 없고 사람도 없어 안타까움 속에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가끔 유엔군 부대에서 성사도 집행하고 인근의 용산성당에서 미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는 라틴어로 미사를 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나마 한국신자들과 관계를 맺고 도움을 줄 수 있게 돼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듬해 5월 첫 임지로 대전교구를 가게 됐다. 당시 대전에 2개밖에 없던 본당 가운데 한 곳인 대흥동본당 보좌신부로 한국에서의 본격적인 사목에 첫발을 들여놓게 됐다. 주임신부는 고 오기선 신부였는데 오 신부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 운영에 힘을 쏟고 있었다. 오 신부의 강론은 누가 들어도 설득력이 있을 만큼 훌륭했다. 내가 한국말을 배워 성사를 주게 되고 점차 주일학교 지도에서 미사 강론까지 할 수 있게 되자 오 신부는 미사 때마다 옆에서 노트까지 하며 강론을 경청한 후 미사 후 잘못된 예나 고쳐야 할 부분 등을 지도해줄 정도로 자상한 분이었다.
이렇게 대흥동본당에서 시작된 인연은 67년까지 13년이라는 적잖은 시간 동안 이어졌다. 교구장이었던 원 아드리아노 주교가 중간에 본당을 분할해 내게 맡기려 하셨지만 당시 오신부와 적잖은 일을 벌여놓은 터라 보좌 일을 계속할 수 있길 청해 허락을 얻었다. 65년 황민성 주교가 2대 교구장으로 착좌한 후 교구 상서국장일을 함께 맡길 정도로 나는 이 땅에서의 사목에 빠져들고 있었다. 오묘한 섭리로 한발 한발 당신이 아끼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이끄심을 체험하게 한 대전교구에서의 삶,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사랑이 일궈내는 조그만 기적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삶의 밑거름이 됐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