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고별사의 일부로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간다는 사실과 예수님의 자기계시의 말씀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예수님은 자신이 가는 목적을 너희가 있을 곳. 곧, 인간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함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이어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사실과 자신과 아버지가 이루고 있는 깊은 내적 일치를 보여 준다.
여기서 먼저 「나는 길이다」란 말씀은 지난 주 복음에 나오는 「나는 문이다」란 의미와 맥락을 같이하는 말로서 자신이 하느님 아버지에게로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 길은 예수님의 추종자들, 곧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삶의 길로 이해되는 길이다.
그리고 진리와 생명. 여기서 진리라는 용어는 우리가 흔히 사용하듯 사실과 부합하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계시의 완성을 의미하는 말로서 예수님은 모든 진리와 생명의 원천인 「하느님에게로 이르는 수단」이라는 의미에서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길, 진리, 생명이라는 용어는 지난 주에 이어 구원에 있어 예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리고 이어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하느님이 이루는 특별한 내적 일치를 보여 준다.
『나를 본 것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그리고 『못 믿겠거든 내가 하는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이러한 말들은 문자 그대로 이해하기보다는 『한 인간의 대리인은 그 자신과 같다』라는 당시의 격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임금으로부터 파견된 사신은 그를 파견한 임금과 동일인으로 생각하던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에 위의 말씀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유일한 사절이요 예언자란 의미가 포함될 말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사절이요 예언자이기에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바로 「일들」이다. 여기서 「일들」은 「기적들 혹은 표징」을 의미한다. 즉, 예수님이 보여주신 기적과 표징들이 하느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위의 말씀들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내적 일치를 보여줌과 동시에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 계시의 완성을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씀들은 비신앙인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들이요, 배타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들이다. 그러면 이러한 배타적인 말씀들 안에 포함된 의도는 무엇일까?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이 말씀들이 그분의 직접적인 말씀이기보다는 예수님을 체험한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다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떤 방법을 안다』 『어떤 길을 안다』 라는 말들. 필자는 「방법」 과 「길」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작년에 운동 삼아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적이 있다.
흔히 달리기는 그냥 뛰면 되지 무슨 아는 것이 필요하냐 하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필자도 같은 생각으로 그냥 시간 나는 대로 뛰다가 어느 날 우연히 마라톤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물론 대부분은 상식적으로 아는 이야기였지만 「자세편」에서는 나의 생각과 반대되는 내용들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달리기를 하면서 그러한 자세, 물론 처음에는 아주 불편하였지만 책에 나오는 자세를 의식하면서 달리게 되자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토록 애를 먹이던 호흡도 편해질 뿐 아니라 좀더 빠르게 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경험하면서 올바른 길과 방법을 아는 것이 어쩌면 맹목적인 실천보다 더 중요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오늘 요한 복음의 말씀이 의도하는 바도 이 같은 맥락이 아닐까 여겨진다.
우리 모두는 영원한 생명을 꿈꾸고 완전한 행복과 자기 완성을 꿈꾸지만 우리가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방법이 잘못 되었거나 아니면 올바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인데,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의 말씀 뿐 아니라 그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표징들이 그분이 길이심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이 길에 동참하여 모두가 꿈꾸는 행복,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을 이루자라는 사랑에 찬 호소가 아마도 이러한 배타적 말씀 안에 포함된 의도가 아니겠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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