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오를 처음 만들 때 지금도 인권변호사로 유명한 유현석 변호사에게 단장일을 부탁했었다. 그러나 우리의 길은 첫걸음부터 쉽지만은 않았다. 주임인 오기선 신부가 레지오를 마뜩찮게 보고 있는 터라 마음을 바꾸게 하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기울여 봤지만 별반 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하루는 그렇게 레지오에 마음 열기를 꺼리던 오 신부가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다 쉬고 있는 지 선생이란 분을 다시 본당으로 이끌면 적극 지원해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게 아닌가. 지 선생이란 이는 개신교 목사로 활동하다 개종한 사람으로 교회 안에서 열심한 활동을 펼친 이였는데 활동을 하다 얻은 오해로 한동안 교회와 단절돼 지내고 있던 터였다. 오 신부의 약속이 있고 난 후 레지오를 준비하고 있던 단원 2명이 지 선생을 찾아갔고 예상치 않게 그는 다음주부터 다시 본당을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본당 사무실로 쓰던 조그만 온돌방에서 레지오 창설을 보고하는 첫 공식 모임 자리, 지 선생의 기적과도 같은 회두를 보고하던 장면은 지금도 희열을 느끼게 할 정도로 기쁨으로 가득 찼었다.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주님의 기쁨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또 젊은이들이 중심이 돼 이뤄지던 주일학교 활동이나 중·고등부 활동, 청년회 활동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뛰게 할만큼 신나고 기쁨이 넘치던 장이었던 것 같다.
그 가운데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활동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오던 일이라 의욕적으로 시작했다.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도록 메시지를 받은 청년들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나눠지며 지금 생각해도 정말 정열적으로 활동을 펼쳤다. 지도신부였던 나도 JOC가 자리잡도록 하기 위해 매주 열리는 모임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함께 하며 하느님의 도움을 청했다.
▲ 대전 대흥동본당 시절 세례식 후 신영세자와 기념촬영했다(두번째 줄 가운데가 두봉 주교).
당시는 먹을 것이 모자라던 상황이라 본당 일을 하는 가운데서도 먹거리는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에 논 개간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무일푼인 상황에서 그 때는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일 용기가 있었던지. 아무튼 눈에 밟히는 가난한 이들의 삶이 우리를 그런 길로 이끌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치원 가까운 곳에 땅을 구해 어렵게 일을 시작했다. 말못할 숱한 고심과 어려움 속에서도 수십 마지기의 땅을 열심히 가꿔 나오는 결실로 기쁨을 나눠주던 일은 이 땅에서 얻은 소중한 기억 가운데 하나다.
또 이 시절 라디오방송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벗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가난의 고통 속에 처한 이들에게 위로가 돼준 것도 나누고 싶은 추억 가운데 하나다. 오기선 신부의 주선으로 MBC와 손잡고 「오분명상」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됐는데 이런 활동은 내게도 신선하게 다가왔다.
당시 적잖은 인기를 누린 이 프로그램을 한동안 진행하며 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주려고 애썼다.
그러던 1967년 가을 나는 5년 임기의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으로 뽑히게 됐다. 이 때 나는 지부의 일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대전에 있던 한국지부를 서울 충정로로 옮기면서 정들었던 대전교구를 떠나게 됐다.
그 때만 해도 40여명의 회원들이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한국에 온 지 10여년만에 지부장의 소임을 맡게 된 나는 그간의 경험을 살려 지부장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던 1969년 5월 나는 생각지도 못하게 처음 교구로 설정돼 첫발을 내딛는 안동교구의 교구장을 맡으라는 새로운 부르심을 접하게 됐다. 끊임없는 기도 속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되뇌던 내게 하느님은 또 어떤 십자가를 지우시려는가, 나는 또 다시 기도 속에 빠져들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