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대사로부터 안동교구 교구장을 맡으라는 뜻이 전해져와 처음엔 정중히 거절을 했다. 그동안 한국사회는 물론 한국교회도 많이 발전했는데 외국 선교사가 새로이 만들어지는 교구를 맡는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개인적인 소신 때문이었다. 선교사는 뒷받침을 해줘야 되지 나설 때가 지났다는 게 당시 나의 생각이었다.
그런 나의 거절이 있고 교황대사는 교황청에 내 의사를 알렸으나 한달만에 다시 내게 돌아온 교황님의 뜻은 교구장을 맡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요청을 해와 더 이상 물리치는 것도 하느님의 뜻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에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을 하게 됐다.
1969년 7월 25일 주교 서품식이 거행되던 당시 내 나이는 채 만40살도 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때 내가 느꼈을 십자가의 무게는 어떠했을까. 그러나 나의 이런 걱정을 기우라고 비웃기라도 하듯 교구의 첫 출발은 굉장히 순탄했고 좋았다. 안동교구가 설정되던 당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끝난 직후였고 현대교회가 지녀야 할 모습과 방향성이 공의회 문헌에 잘 담겨져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큰 힘이 됐던 것 같다.
안동교구 출발 당시 교구 전체 본당수는 19개였는데 한국인 신부는 단 1명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선교사로 한국에 와있던 외국인 신부들이었다. 대구대교구에서 1명의 신부를 파견해줘 얼마나 다행이었던지. 사람의 삶처럼 교회의 역사에도 굴곡이 있기 마련인가. 순조롭던 2∼3년이 지나면서 적잖은 어려움이 닥쳤다. 먼저 나 자신부터 교구 사목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는 점을 밝혀둬야 할 것 같다. 당시 안동교구는 상주와 문경에 거주하는 신자가 교구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역적인 차이로 인해 일반신자들은 물론 신부들 사이에서도 적잖은 차이가 있어 하나되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여파로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는 교회에서 신부가 도움이 될 게 없다고 생각한 선교사제들이 본국으로 하나둘 돌아가면서 본당이 비기 시작했다. 결국 교구가 출발하고 몇 년만에 19개 본당 가운데 7개 본당에 신부가 없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급기야 다른 교구에 사제 파견을 요청했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던 나는 구인덕 신부를 총대리로 임명하면서 교구를 맡기고 외국에 나가 한동안 긴 피정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당시로서는 개인적으로도 정신적으로 타격을 많이 받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상황이었다. 주위의 도움으로 모처럼 생각을 가다듬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10일간의 피정, 오로지 홀로 정진한 시간이었다. 떠나올 때 생각했던 것처럼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교구 주인은 주님이시고 나는 일꾼이니 내가 걱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주님께 맡겨야 한다」 피정을 통해 내가 얻은 결론은 이것이었다. 피정에서 돌아와서는 하루 1시간의 묵상시간을 정하고 기도를 많이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것이 그 때나 지금이나 삶에 많은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이렇게 해서 피정에서 돌아오자 여러 곳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도움이 밀려들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와 타 교구에서 여러 명의 사제를 보내준 것을 비롯해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이들도 있었다. 어떻게 감당해내야 할 지 모르던 위기를 극복해가며 새로운 힘이 솟아나는 기쁨을 맛보았다. 이런 것이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던 1979년 8월 「안동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오원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나는 결론적으로 이 사건이 안동교구의 사제와 신자들이 단합이 잘 되고 한뜻을 이룰 수 있었기에 생겼다고 본다. 당시는 엄혹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는데 공업화 일변도의 정책 때문에 농민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이런 현실이라 농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이들의 위로자인 교회가 외면할 수가 없었다. 당시 가톨릭농민회가 앞장서 농민들이 기본적으로 알아야 될 농업정책에 관한 지식이나 각종 농업법 등을 알려주며 도움이 됐는데 이런 농민회를 교회에서도 뒷받침했다. 이 과정에서 이론이나 사상조차 모르면서 올바른 삶을 이야기하고 나눴다는 이유만으로 용공분자로 몰려 희생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오원춘도 이 가운데 한사람이었다.
「오원춘 사건」의 발단은 애초 큰 문제가 될 게 없는 일이었다. 군에서 권장한 감자농사가 종자불량으로 흉년이 들어 농민들의 원성이 커지자 군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을 했는데 이 사실을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 이사 겸 청기면분회장이었던 오원춘(알퐁소)씨가 농민회 전국모임에서 보고하면서 일이 커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오씨를 가두고 폭행하면서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지기 시작했다. 오씨가 폭행당한 사실을 교회에 알리면서 교회가 오씨를 감싸자 경찰이 영장없이 교구청을 습격해 농민회 지도신부와 농민을 체포하면서 교회와 정부간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때 안동교구민을 비롯한 사제들은 한마음이 돼 안동과 서울의 명동 등을 돌며 항의기도회를 열어 부조리한 정권을 비판했다. 이렇게 사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정부는 이 사태의 책임자로 나를 지목해 추방명령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시련은 신앙을 다지는 모양인지 이런 가운데 멈출 줄 모르는 신자들의 기도와 염원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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