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현이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다. TV 볼 시간도 없고 친구와 놀이터에서 흙장난 한 번 할 시간이 없다. 미현이가 학교 외에 따로 공부해야 하는 것은 모두 5가지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기본이다. 힘들다고 투정을 부릴 수도 없다. 친구들 중에는 무려 10가지 씩이나 하는 아이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 정도는 기본”
아이의 엄마인 조미연(35·서울 상계동)씨는 아이가 피곤해 하는 것을 잘 알지만 다른 아이들과 비교해보면 그렇게 무리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학교 가서 자신감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어요. 안 그러면 아이가 뒤처져요. 수업시간에 제대로 발표도 하고 선생님께도 주목을 받기 위해서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대부분 엄마들의 생각입니다』
역시 마찬가지로 아이를 여기저기 학원으로 보내야 하는 박기수(38·서울 목동)씨는 아이들을 이렇게 「뺑뺑이」를 돌리는 것이 아주 못마땅하다. 아이가 피곤해서 코피라도 쏟을라치면 아내와 말다툼이 시작된다.
『애가 놀 시간도 있어야지 이게 뭐하는 거야』
『다른 아이들은 안 그래요? 이 정도는 다들 하는 거예요』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선생님에게 인정 받고 자신있게 생활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아니 적어도 다른 아이들만큼은 따로 배워야 한다는 아내의 강변에 박씨는 두 어번 말대꾸를 하다가 입을 다문다. 자신도 그 사정을 뻔하게 알기 때문이다.
초등학생 90%가 과외
지난해 7월 한 시사주간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초등학생 10명 가운데 9명이 과외를 하고 있으며 이들이 받는 과외 종목이 평균 3.13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과외 수업에 들이는 시간은 하루 평균 2시간 37분에 달한다. 그야말로 학교를 마치고 나서 과외시간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이들이 가장 많이 받는 과외는 학습지, 보습학원, 예체능학원, 개인과외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가정에서 부담하는 개인과외와 학원비 등 사교육비는 무려 26조 6736억원. 여기에 등록금과 교재 구입비 등 공교육 부대 비용으로 들어간 돈 13조677억원을 합하면 학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들이는 비용은 연간 무려 39조7413억원에 달한다. 이 액수는 2001년도 국내총생산(GDP) 475조원의 8.4%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이다.
입시를 앞둔 고교생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의 과외 열풍도 이제는 엄청난 수준에 도달했다.
유치원생이 12가지 과외
유치원생의 경우 86%가 방과 후에 특기 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40%가 3가지 이상의 별도 교육을 받는다. 교육인적자원부가 의뢰해 지난해말 완성한 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 나라 유치원생의 86%가 유치원을 마치고 별도로 한글과 영어, 수학, 피아노 등 각종 조기 및 특기 교육을 받고 있으며 일부는 무려 10가지가 넘는 교육을 유치원 교육 외에 별도로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100만원을 넘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부터 12월까지 전국 16개 시도 사립 유치원에 만2세부터 7세까지의 자녀를 보내고 있는 부모 21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이 조사를 보면 그 중 1847명이 유치원 교육 이외에 별도의 조기 특기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짓수는 2가지가 30%로 가장 많았지만 10가지 이상을 받는 유아, 12가지를 받는 유아도 있었다.
▲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과외나 학원 수업이 아이 교육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이면에는 『다른 아이들이 하니까…』하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의 근저에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극도의 경쟁 심리가 깔려 있다.
그러면 이렇게 횡행하는 과외와 학원 수강이 아이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앞서 언급한 한 주간지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들이 지금보다 더 해보고 싶은 일은 컴퓨터, 친구와 놀기, 책읽기, TV 시청, 가족과의 대화이다. 반면 덜했으면 좋겠다는 것은 학원 수업, 학습지 풀기, 학교 숙제, 개인과외, 책읽기 등으로 나타났다.
아이들이 가장 덜 하고 싶어하는 상위 5가지 중에서 학원 수업, 학습지, 개인 과외 등 대부분이 과외, 학원 수업과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아이들이 받는 스트레스의 대부분이 과도한 사교육으로 인한 것임을 보여준다.
이런 정신적 스트레스는 직접적으로 육체적인 질환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최근 들어 소아정신과를 찾는 환자가 급증하고 있는 현상도 이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종합병원을 찾아오는 소아정신과 환자 아이들의 상당수가 심각한 정신적 장애를 앓고 있으며 이들 중 대부분이 부모의 극성스런 교육열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고 한다. 적지 않은 아이들이 근육 긴장, 두통, 소화 장애 같은 스트레스성 질환이나 각종 신경성 질환, 우울증, 품행 장애 따위를 앓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어린이들이 머리가 빠지는 탈모 증세를 보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피아노, 바이올린, 골프, 영재학원 등 4~5군데의 학원을 다니면서 저녁 늦게서야 부모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아이들 중에서 주로 40대 이상의 성인들이 경험하는 탈모증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증상은 아직 스트레스 외에는 정확한 원인이 규명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현재로서는 부모와의 장기간 격리, 과도한 학원 수업과 학업에 대한 고민 등 심리적인 스트레스가 주원인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6개월 이상 탈모증 치료를 받던 아이들 중에는 부모가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면서 심리적인 안정을 되찾게 해주자 곧 치료가 됐다고 한다.
교육비 빼면 월급 안 남아
사교육에 들어가는 비용도 큰 문제이다. 서울 상계동에 살면서 조그맣게 무역업을 하는 김기연(50)씨의 월 수입은 300만원 내외. 그 중에서 고등학교 3년생인 첫째의 과외 및 학원비가 100만원에 달하고 고1인 둘째에게도 80만원 내외의 사교육비가 들어간다. 절반 이상이 사교육비로 들어가고 생활비를 제외하면 남는 것이 없다. 저축은 꿈도 못꾼다.
초등학교 3, 5년의 두 아이를 둔 박기태(38)씨의 경우도 만만치 않다. 첫째 딸의 영어학원, 태권도, 미술학원 교육비에 둘째 아이의 영어학원, 수영강습, 바이올린, 피아노 등에 소요되는 비용을 빼면 한달 수입 250여만원에서 남는 것은 100만원 정도. 아파트 관리비, 생활비 등을 제하면 매달 적자이다. 그렇다고 하나라도 빼려니 부모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에게 뒤처질 것 같아 불안하다.
공교육 부실화 부작용
아이들의 과외 교육은 당연히 학교 교육에 큰 부작용을 나타낸다. 미리 학교 공부를 앞서서 공부한 아이들은 학교 교육에 흥미를 잃게 된다. 결국 학교에서는 딴 짓을 하다가 방과 후에 다시 학원으로 간다. 사설학원들은 이를 부추김으로써 학교 교육은 무력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이 같은 악순환은 초등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이어지고 입시를 앞두면서부터는 더욱 심화돼 의무교육 과정에서 익혀야 할 가치관이나 전인교육은 소홀히 되고 아이들은 공부벌레로 키워진다. 유아기부터 강요와 강박에 시달린 아이들은 친구들, 심지어 부모들과의 관계에서조차 원만하지 못하고 공동 생활에도 제대로 적응을 못한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과외로 이어지는 빡빡한 생활 속에서 아이들은 녹초가 되고 건강에도 문제가 생긴다.
학부모 의식 바뀌어야
대안은 있는가? 전문가들은 근본적인 대책은 결국 학부모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학부모들이 과외나 학원 수업이 아이 교육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 이면에는 『다른 아이들이 하니까…』하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의 근저에는 남보다 앞서야 한다는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극도의 경쟁 심리가 깔려 있다. 여기에 학교 수업, 공교육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이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교육 문제는 워낙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의 실마리를 풀기 위한 노력은 결국 우리 부모들로부터 시작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특기 교육을 미리부터 시킨다면 당장은 눈에 띄는 아이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들을 고려하면 그것이 아이에게 결코 보탬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학부모들이 깨달아주었으면 좋겠어요』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한 선생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