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내게 내려진 박정희 정권의 추방령은 국제적 외교관례를 무시한 것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지자 급기야 교황청을 대신해 교황대사가 나서게 됐다. 교황대사는 외무부장관을 비롯해 정부 고위인사들을 만나 바티칸과 수교를 맺고 있는 이상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일방적으로 추방할 수 없다며 이들을 설득했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나를 둘러싼 문제는 새로운 반전을 맞게 됐다. 해외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다는 정부의 약속을 받고 나는 이 문제를 수습하기 위한 교황청의 불리움을 받고 로마로 향했다.
교황청에서도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상황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한동안 교황청에 머물며 탁류의 한가운데 놓인 한국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올바른 대처방안을 기도 가운데 모색했다. 이런 모색에 힘을 실어주려고 했음인지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김수환 추기경과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던 윤공희 대주교를 로마로 불러들였다.
교황 집무실에서 교황을 비롯한 김추기경, 윤대주교 등과 머리를 맞대고 토론한 결과, 한국교회가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올바르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됐다. 이런 논의가 있고 난 후 다시 한국에 들어오니 정호경 신부 등 농민회 간부들이 함께 한 가운데 오원춘씨의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끝내 유죄선고가 내려졌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을 맞고 뒤를 이은 최규하 대통령이 그간의 긴급조치를 해제하면서 오씨는 풀려 나오게 됐다. 교회가 함께 하는 몸짓으로 나섰던 오원춘사건은 그렇게 일단락 되어가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사건을 신자들이 몸소 인내해낸 민족사의 큰 아픔으로 기록하고 싶다. 아울러 현대사회의 거친 흐름 속에서 우리 교우들이 당한 수난과 박해의 역사로 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가운데 신앙을 무기로 한 뜻이 됐던 신자들의 모습은 누가 봐도 대단했다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불의에 결연히 맞서 물러설 줄 몰랐던 신자들의 훌륭한 모습이다. 22년간 교구를 맡아 오면서 신자들이 이토록 고맙고 아름다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직접 당한 이 일 외에도 한국교회는 원주교구장이던 지학순 주교가 1974년 7월 내란선동 및 대통령긴급조치위반으로 구속돼 징역15년을 선고받는가 하면 이듬해에는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로 인해 일어난 「3·1절 명동사건」으로 8명의 사회인사들과 함께 서울대교구 함세웅 신부,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 원주교구 신현봉 신부 등이 구속되는 등 숱한 탄압 속에서도 하느님의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 시대가 안겨주는 십자가를 지는 모습이었다. 이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김수환 추기경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교회 안팎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누가 봐도 분명 힘든 안동교구였지만 성직자와 수도자는 물론 평신도들도 이런 상황을 원망하기 보다 오히려 어려운 교구에서 져야 될 나름의 십자가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다.
교구장 재임 시절 내내 경제문제는 늘 고민덩어리였다. 내가 보기엔 헌금이나 교무금을 내지 못할 형편인 것 같은데도 신자들은 어떻게 해서든 마련해 봉헌하는 모습이었다. 아마 하느님의 사업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나도 이런 신자들의 뜻에 힘이 되어주기 위해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활동에 많은 노력을 투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을 비롯해 독일이나 네덜란드 등 해외교회도 돌아다니며 도움을 청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가운데는 기적과도 같이 생각되는 일도 있다. 매년 연말 다음해 예산을 준비할 때면 한번도 예외없이 지출이 수입보다 두세배가 많아 교구일을 하는 이들에게 적잖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곤 했다. 그런데도 나는 어쩌면 터무니없게도 생각되는 예산안을 한번도 반려하는 일없이 통과시켰다.
그런데 기적은 여기서 일어났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채워주셨음인지, 원조를 청하지 않은데서 뜻하지 않은 원조가 온다든지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이 후원금을 보내오기도 했다. 하느님께서 어려움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믿음에 나는 내 능력을 넘어서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동에 처음으로 문화회관을 만들어 지역사회에 개방한 일이나 구호사업, 특히 나환자들을 위한 일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중에 있었던 소중한 기억들이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가운데서도 지역의 교육사업을 위해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도 아마 하느님께서 채워주신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함창에 「상지여자중·고등학교」를 세운 일,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대학인 가톨릭상지대학을 설립한 일은 무수한 어려움 속에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었던 좋은 추억들이다.
또 교회가 어려운 이들을 위해 거리낌없이 나서는 모습에 고마워하고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도 성원을 보내준 도지사를 비롯한 시장 군수 등 안동의 사회 인사들도 적잖은 힘이 됐던 것 같다. 유교의 본고장이라 할만한 안동에서 유림들이나 불교계와도 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양심적으로 나설 수 있었던 교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교회가 「가난」을 제 몫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나는 이렇게 기적과도 같은 일상 속에서 체험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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