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함께 짊어지고자 했던 교회의 모습은 서슬 퍼렇던 독재정권의 탄압 가운데 섰던 수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이끄는 힘이 됐다. 안동교구가 농촌교구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교세를 키워올 수 있었던 배경도 교회를 희망의 저수지로 생각했던 많은 이들의 기대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동교구는 신자수가 적어 화목하고 인간적인 면이 많다는 좋은 점도 있지만 신자들이 다양한 신앙체험을 하기에는 여건이 좋지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능한 한 신자들이 많은 경험을 통해 신앙의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었다. 다른 교구 못지 않게 크고 작은 많은 행사를 열었던 뜻이 여기에 있다. 가장 먼저 시도했던 것이 교구 차원의 성체거동 행사였다. 그러나 이 행사에 참여하는 이들 가운데는 성체가 뭔지 조차 모르는 외교인들이 많아서 다른 방향을 모색하게 됐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신앙대회였다. 한국교회에서는 최초로 이뤄진 신앙대회는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신들의 현재를 돌아보며 자긍심을 얻어 가는 계기가 됐던 것 같다. 신자들의 반응도 좋아 교구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거의 매년 「신앙대회」를 개최했었다. 신앙도 한 곳에만 오래 머물다 보면 「우물안 개구리」식으로 변할 것 같아 1981년 10월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행사를 비롯해 89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 등 교회 안의 굵직굵직한 행사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교구 신자들을 이끌고 다니며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었다.
공소가 많은 교구 현실은 새로운 의사소통 구조를 필요로 해 「공소사목」이라는 소식지를 만들게 됐다. 농촌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내용을 다양하게 담고 신자공동체가 공소예절을 할 수 있도록 한 「공소사목」은 지금도 내게 꼬박꼬박 배달돼 궁금한 소식을 전해주는 반가운 손님이 되고 있다.
공업화로 농촌을 떠나는 행렬이 급속히 늘면서 신자들이 조금씩 밖에 늘지 않았지만 나는 신자들에 대한 교육이 교회에 생명력을 더해갈 수 있다는 믿음에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었다. 작은 곳에 살다보면 위축감에 쉬 용기를 내기 힘든 농촌신자들에게 조금은 부담이 될 수 있을 정도로 레지오를 비롯한 꾸르실료 등 다양한 단체를 만들어 지원했었다. 이런 가운데 열린 교회로 지역사회와 함께 사는 안동교구의 면모는 자연스럽게 갖춰지게 된 것 같다.
시대가 던져주는 크고 작은 십자가를 지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신자들 가운데서 교구장으로 행복한 10년을 보낸 나는 1979년 교황청에 사임 요청서를 냈다. 그간 한국교회의 상황도 많이 달라지고 안동교구도 어느 정도 체계를 갖춰 나가고 있었기에 이제는 한국인이 맡아도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교황청에서는 교구장직을 좀 더 맡으라는 뜻이 전해져왔다. 한국의 주교들 가운데서도 내 뜻을 이해하면서도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 일이 있고 나서도 나는 5년마다 사임신청서를 교황청에 올렸다. 그러다 네 번째에야 뜻이 받아들여져 90년 10월 한국인 주교에게 교구를 넘길 수 있게 됐다. 마침 그 때는 한국주교단의 사도좌 정기방문인 앗 리미나(Ad Limina) 기간 중이어서 교황청에서 소식을 접한 나는 즉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새해가 시작되기 전에 새 교구장에게 일을 넘기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내 마음이 바빴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는 새 교구장이 안동교구를 맡자마자 서둘러 안동을 떠났다. 22년간 안동교구에 있으며 교구 내 대부분의 신부들에게 사제품을 줬기에 안동에 머물러 있으면 후임 교구장에게 큰 부담이 될 것 같아서였다.
안동교구를 나오며 한달 간의 피정에 들어갔다. 앞으로 남은 여생을 어디에 바쳐야 하느님이 주신 몫을 제대로 살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 때 피정을 지도한 이가 지금 서울대교구 보좌주교가 된 이한택 신부였다. 이 신부의 도움을 받으며 이냐시오식 피정을 했는데 오랜 동안 내 나름의 영성생활을 해오며 틀이 잡혀 있던 터여서 조금은 힘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피정을 마칠 때쯤 내 머리 속에는 두 가지의 결론이 떠올랐다. 그 첫째는 북한동포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사제들의 영성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내 생각 때문이었는지 하느님의 뜻이었는지 피정 후 2∼3개월간 휴가를 겸해 외국에 머무는 동안 북한사람들과도 접촉할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던 북한대표부를 통해 방북의사를 타진했는데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그래서 91년 부활미사는 평양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품게 됐으나 결국 그 뜻은 이루지 못했다. 꽤 시간이 흐른 97년에야 북한을 다녀올 수 있었다.
휴가 후 한국에 돌아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공소 한곳을 맡겨 달라고 청해 허락을 얻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곳이 지금의 행주외동성당이다. 처음 이곳으로 옮겨올 땐 그린벨트지역인데다 군사지역이라 사제관을 지을 수 있을 지 걱정이 됐는데 의외로 쉽게 허가가 나왔다. 사제관을 지을 당시 주위에서는 반대가 많았지만 나는 조립식주택을 고집했다. 사는 집에 따라 마음가짐은 물론 삶을 대하는 자세마저 달라졌던 교구장 재직 시절의 경험이 크게 작용한 셈이다. 누구든지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화려하지 않은 집 속에서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 살고 싶었던 것이다. 능곡본당의 관할이기에 나는 지금 인생의 남은 시간을 행복한 보좌신부(?)로 지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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