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야!』
자신을 부르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음인지 아빠의 얼굴을 발견한 은혜(율리안나)가 상기됐던 얼굴에 이내 웃음꽃을 터뜨리며 달려와 와락 품에 안긴다. 몇개월 전의 은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모습이다.
입양부모임을 당당히 밝히는 홍승준(하상 바오로.49.수원 정자 꽃뫼본당) 원용선(효주 아녜스.43)씨 부부는 은혜로 인해 오히려 하느님의 새로운 은총을 삶 속에서 체험하고 있다며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우리 은혜, 「기도손」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몰라요, 보세요. 성호경은 또 얼마나 귀엽게 하는데요…』 아기의 모든 행동이 신기하기만 한 여느 엄마 아빠들처럼 은혜에게 쏙 빠진 두 부부는 눈을 뗄 줄 모른다.
홍씨 부부가 은혜를 입양한 것은 지난해 3월, 태어나자마자 국내입양기관인 성가정입양원에 맡겨진 은혜가 막 「삼칠일(三七日)」을 넘기고 난 직후였다.
이들 부부는 그러나 은혜의 입양을, 자신들의 소원을 하느님께서 들어주신 거라고 털어놓는다. 큰아들 창화(대건 안드레아?23)와 작은아들 재화(베드로?13)를 낳고 난 후 딸아이를 입양하자고 농담처럼 되뇌어왔던 것이다. 지난 97년부터 입양을 구체적으로 준비하기도 했던 부부는 IMF로 어려움이 닥치면서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기도하는 가운데 문득 경제적 여건이 고민의 중심이 돼왔던 어리석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10여년 전 저희들에게 입양하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주신 것조차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입양 이후 가족들의 삶 전체가 은혜를 중심으로 바뀌었다. 살림살이 배치 등 집안의 구조는 물론이고 전 가족의 생활 자체가 은혜를 향하게 됐다.
『여동생이 생겨서 좋구요, 엄마 아빠가 10년은 더 젊어지신 것 같아서 좋아요』 처음엔 아기를 데려온다는 말에 얼떨떨하기만 했던 둘째 재화도 학교에 갔다오면 은혜부터 먼저 찾을 정도다.
은혜를 입양한 후 세상을 보는 눈도 어느새 달라져 버렸다. 예전엔 잘 다가오지 않던 미혼모 문제가 자신들의 문제로 느껴졌고 「생명」이라는 말이 던져주는 무게감이 더욱 무겁게 가슴 한켠에 쌓여가는 것이다. 이런 때문에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인터넷상에서도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고 죽음의 문화와 맞서는 생명의 전도사로 나서고 있는 요즘이다.
은혜의 입양 사실이 알려지면서 주위에서도 입양을 하고 싶다는 이들이 두 부부를 찾곤 한다. 그럴 때마다 두 부부가 들려주는 말이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듯이 아기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 취재후기
바로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이 자라고 있었다
혈연의식이 강한 우리 사회에서 남이 낳은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더구나 「공개입양」한다는 사실은 십자가를 지는 결단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 십자가는 여느 십자가와는 다른 의미와 무게감을 던져주는 것이 현실이다.
자신이 가진 어떤 물질을 나눈다거나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어쩌면 「공개입양」을 한 부부들의 나눔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 나보지도 못하고 꺼져버릴 수 있었던 「무거운 생명」을 받아 안아 하느님의 사랑으로 키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개입양 부모들의 삶은 자신의 미래를 돌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에 자신을 무조건 내어 맡김으로써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려 한 신앙의 성조 아브라함의 거룩한 사랑을 읽게 한다.
생명의 날에 만난 홍승준?원용선씨 부부에게서는 자신들에 대한 자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두 부부가 보여준 하느님이 주신 새 생명에 대한 자랑만큼 아름답고 소중한 보답은 없을 듯 싶었다.
누구나가 편안한 삶을 얘기하고 준비
에 한창일 때 홍씨 부부가 택한 삶은 새로운 고달픔을 인내하고자 하는 결단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포기하는 삶을 통해 하느님의 창조사업에 협력하는 사람들, 지나친 미화일까. 홍씨 부부, 그리고 홍씨 부부가 들려주는 공개입양 부모들의 삶은 죽음의 문화와 맞서는 당당하고 아름다운 몸짓임을 깨닫게 해주고 있다.
가정이 십자가일 뿐 아니라 하느님나라임을 보이고 있는 홍씨 부부의 얼굴에서는 하느님나라를 맛본 이의 평화로움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은혜를 평화로운 얼굴로 안은 엄마와 엄마의 품에 안긴 채 웃음을 되찾는 아기의 해맑은 표정 속에서 그리스도의 평화와 사랑이 자라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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