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삼위일체란 감사송에 나와 있듯, 성부 성자 성령은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위로서 하나가 아니시고 삼위일체이신 본체로서 하나라는 것, 한 하느님이 세 위격으로서 존재하는데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이고, 본질이며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된 개념들의 교의적 정의는 내려진 바 없다.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위격 개념과 본체와 본질. 본성이라는 말에 대한 용어의 이해가 우선 필요하다.
위격이라는 말은 개별적 존재라는 의미를 포함한 말이다. 원래 이 말은 「가면」을 뜻하는 그리이스어에서 유래하여 사람에게 적용될 때는 「인격」 혹은 「성격」이라는 말로도 사용되는 개념을 신학에서 쓰고 있는 말이다. 이 위격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타 존재와 독립하여 그 자체로 존속하는 완전한 실체』라고.
그리고 본성과 본질 실체라는 말은 학자들에 의해서 약간씩 다르게 해석되지만 이 말들이 가지는 하나의 공통점은 「변화해 가는 사물의 근저에 있는 지속적이고 불변하는 것」, 「바탕을 이루는 것」, 「근본에 있는 존재」를 가르키는 말이다.
때문에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은 외적으로는 성부, 성자, 성령이라는 세분으로 구별되지만 본체로서는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삼위일체는 절대 신비로서 이성에 의해 온전히 파악할 수 있는 신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무리 지적인 정의와 개념을 가지고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이해 할 수 없다.
그러기에 삼위일체 교리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말이 나오게 된 배경. 초대교회가 어떤 체험을 이렇게 표현했는가 하는 그들의 원체험을 뒤돌아 볼 때 삼위일체가 어떤 의미와 뜻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초대 교회 신자들은 대부분 유다인이었다. 때문에 이들은 이미 구약의 하느님 야훼를 유일신을 알고 신앙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이들이 이제 육신을 취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었고 성령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제 이들은 이러한 체험을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던 것이다.
구약의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그리고 지금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 이 세분들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
분명한 사실은 이 분들은 외적으로는 구별되고 다른 분이라는 사실에는 의의를 제기할 수 없는데 그러나 그분들의 모습 안에는 무언가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또 다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외적인 구별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밖에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흑인과 백인, 그리고 평범한 인간들과 여러장애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남성과 여성, 어른과 어린아이등 다양한 인종과 계층의 사람들.
물론 이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은 각각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외적인 차이점을 넘어서는 하나의 본성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즉, 그들은 인간이라는 점에서는 하나인 것이다. 여기서 오늘날 민주사회의 기초인 평등과 인권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아마 초기에 성부, 성자,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외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사랑과 어떤 본질」에 대한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삼위일체 교리가 생겨나게 된 배경이 아닐까 추론해 보는 것이다.
어떻든 삼위일체 축일을 지내는 오늘 교회는 요한 복음을 통해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
하느님은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기에 외아들을 보내 주셨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목적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이 아들을 파견하신 이유요, 아들의 파견 목적도 「단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가없는 사랑은 「믿음」 안에서만 결실을 맺을 수 있기에 믿음으로 하느님 사랑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복음의 교훈인 것이다.
이러한 말씀은 하느님을 엄하신 심판관으로 생각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응답을 드리기보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많은 신앙인들이 사랑으로 일치되어 있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묵상하면서 되새겨야 할 좋은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 보게 된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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