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 행주에서 느끼는 행복 가운데 하나는 애초 이 곳으로 오며 생각했던 대로 신부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다. 사제와 수도자들의 피정 요청이 끊이지 않아 나는 즐거운 비명을 질러야 할 지경에 처할 때도 적지 않다. 영적으로 가장 순수한 때인 피정이란 장에서 많은 이들과 영적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이 또한 크나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이 나이에도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고 조그만 재능이지만 나눌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또 지난 95년부터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장을 다시 맡게 돼 느지감치 일복이 터진 셈이다.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한국에 왔던 170여명의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가운데 10명이 103위 성인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내가 잠시라도 한국교회를 떠날 수 없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지금도 10여명의 한국인 신부들이 파리외방전교회 본부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국에 남아 있는 회원들이 많은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
나는 그간 한국교회에서 많은 영세자가 나온 것에는 하느님의 숨은 뜻이 있다고 믿는다.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사람을 도구로 쓰시는 하느님께서 한국인들을 도구로 쓰시기 위함이 아닐까 한다. 본래 평신도의 사명은 각자에게 주어진 몫을 통해 우리가 살고 세상을 복음화하는데 있음을 새롭게 깨닫는다. 정치 경제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있는 신자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깨닫고 가정과 일터, 사회에서 제 몫을 열심히 사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믿는다.
한가지 비유가 되겠지만 나는 종종 사람을 물고기로 생각해 사회를 비춰보곤 한다. 오염된 물에서 죽어가고 있는 물고기를 살리고자 한다면 낚시나 그물 등으로 그 고기를 잡아 좁더라도 맑은 물로 옮기는 것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또 하나는 더 이상 물이 오염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 있다. 지금까지는 교회가 주로 앞서의 방법으로 흙탕물과도 같은 세상 속에 사는 이들에게 세례를 줘 하느님께로 이끌어왔다면 이제는 후자의 방식을 적극 고민해야 될 때가 오지 않았나 싶다. 사회가 오염되지 않도록 옳지 못한 사고방식과 부정 부조리 등을 바꾸는데 신자들의 몫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남과 함께 살려는 노력을 할 때 사회분위기는 바뀌게 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교회의 문턱이 높다는 말은 안동교구와는 무관한 얘기였다는 생각이 든다. 세상 속에서 함께 웃고 우는 예수의 모습이 올바르다는 생각에 신자들이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의 흐름에 늘 눈과 귀를 열어둘 수 있도록 힘을 쏟았던 기억이 새롭다. 신자들이 이웃 한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누룩」처럼 생활한다는 의식이 중요했던 당시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래서 어떤 행사를 하더라도 행사 전후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비신자인 이웃과도 함께 노래부르고 흥을 나누었던 모습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될 것 같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지금껏 얼마나 춤을 많이 췄는지 모른다. 말만 하고 행동으로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다른 이들이 보면 주교라는 위치에서 상상하기 힘들었을 일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내가 이런 모습을 보였기에 신부들도 주민과 함께 사는 교회의 모습을 마음에 담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또한 놀이문화가 빈약한 농촌교구라는 특성상 비신자들에게 「재미있는 교회, 잘 노는(?) 신자」라는 인식을 심어주었던 것이 이들이 교회에 쉽게 발걸음하게 할 수 있는 바탕이 됐던 것 같다. 이런 삶 속에서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펼치는 어떤 운동도 신자들만으로는 이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근래 활발해지고 있는 「도·농교류」 등 다른 교구나 단체들과의 다양한 나눔의 삶도 교회 안팎의 많은 이들의 힘과 지혜를 모으지 않으면 한걸음 한걸음을 옮기기 힘든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짧지 않은 그간의 삶을 통해 새롭게 깨달아온 진리 가운데 하나는 조그마한 정의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곧 불의와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곳곳에 「살아있는 신앙심」을 심고 싶다는 바람을 지니고 살고 있다. 이런 고집스러움 때문에 혹여 주위사람들에게 부담을 줬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부담을 주려했음이 아님을 이 자리를 빌어 밝히고 싶다.
아쉬움이 있다면 늘 부족할 수밖에 없는 주님의 일꾼으로서 기쁜소식을 전하는데 부족했다는 생각이다. 이런 가운데 이웃에 주님의 모습을 충분히 보여드리지 못한 점 용서를 청하고 싶다.
▲ 두봉 주교(가운데)가 지난 4월 28일 구산성지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 순교 161주년 기념미사를 주례하고 있다. 두봉주교 왼쪽은 정종득신부, 오른쪽은 서울대교구 최석우 신부.
지금까지 수고해 주신 두봉 주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다음호부턴 대구대교구 이종흥 몬시뇰의 「삶과 신앙」이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