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삶, 차라리…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둔 한 부부. 얼마 전 7개월만에 조산한 두 번째 아이를 떠나 보냈다. 발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아이는 폐를 비롯한 장기 형성이 완전히 이뤄지지 못해 숨 한 번 쉬기가 고통스러운 듯했다.
아이를 컴컴한 중환자실에 홀로 두고 발걸음 돌리기를 한 달여 남짓, 의사는 기대를 접으라고 말한다. 혹시 살아나더라도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신장에도 구멍이 뚫려있고 폐로 숨을 쉴 수도 없다. 인공호흡기를 떼면 아이는 숨을 멈춘다.
어찌할까. 저토록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에게 그만 쉬게 해주는 것이 어떨까. 하지만 살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을 포기할 순 없었고 마지막 순간까지 부부는 최선을 다했다. 결국 아이가 세상을 떠났을 때 주위에서는 『차라리 잘됐다』며 위로했지만 부부는 억장이 무너졌다.
포낭섬유증식증에 걸린 11살의 한 소년. 기관지염, 폐종양, 폐기종, 그리고 기관지폐렴 등 여러 가지 합병증을 앓고 있는 이 소년은 몇 달밖에 살지 못한다. 그나마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방법은 기관지경을 사용해서 노폐물을 긁어내는 것이지만 이 고통스러운 치료도 임시방편일 뿐이고 기껏해야 며칠이나 몇 주 더 생명을 연장할 뿐이라고 한다.
엄마는 차라리 치료를 중지하고 아이가 될 수 있는대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엄마의 요청을 거절했고 이로 인해 법정 소송이 벌어지게 됐다.
이럴 때 아이의 고통을 보다 못한 엄마의 요청대로 치료가 중지돼야 하는가, 아니면 병원의 주장대로, 또 법대로 치료가 계속돼야 하는가? 치료가 중지돼야 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고 계속돼야 한다면 또 그 이유는 무엇인가?
삶과 죽음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결단의 순간들
이런 문제들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발생하는 매우 곤혹스러운 문제들이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질병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 있는가.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치료를 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또는 환자가 더 이상 극도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치료를 중지해 죽음을 맞는 것을 도와주어야 하는가. 그러면 치료를 중지해야 할 때가 있다면 그 때는 언제인가. 안락사 문제가 심각하고 신중하게 논의돼야 하는 이유는 생명의 문제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절대적으로 수호하는 방향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따라서 최대한 신중하게 검토하고 결정돼야 한다.
논란과 혼란
안락사 논란이 본격화한 것은 지난해 11월 대한의사협회가 「의사윤리지침」을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지난달초 대한의학회가 「임종환자의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의료윤리지침」 초안을 발표하고 지난해 관련 조항을 구체화함에 따라서 안락사 논쟁이 재연됐다.
여기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소생불능환자의 진료비 지급을 거부하고 일부 병원에서는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나 가족이 심폐소생술을 거부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회복 불능 환자에 대한 치료 중단은 사실상 오랜 관행으로 이뤄지고 있는 듯하다. 940여명의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최근 조사에 따르면 그 중 96.3%가 이미 연명 치료 중단의 경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법적으로 이러한 행위는 불법인 것도 사실이다. 지난 5월 14일 가족의 요구로 환자를 퇴원시켜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에게 살인방조죄가 적용됐다. 의료계는 이 판결을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관련 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사회적으로 민감하면서도 긴급한 사안에 대해 팔짱을 끼고 있다는 비난도 일고 있다.
결국 우리 사회에서의 현재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은 한마디로 혼란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이에 대한 윤리적 한계를 명확히 하고 이를 바탕으로 의료현장과 법 제도, 국민 인식 등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논의해 윤리적 한계 안에서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개념상 혼란
「안락사」는 그 개념상에 있어서도 매우 혼란한 상황이다.
통상적으로 일상화된 의미에서 안락사는 「적극적」 「소극적」 안락사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거의 모든 나라들이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반면 소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는 좀더 논의의 여지가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경향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안락사 논쟁은 적극적 안락사까지도 허용하는 네덜란드와는 달리 「소극적 안락사」는 허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얻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도 안락사와 관련된 용어와 개념이 매우 혼란스럽고 부정확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대한의학회의 의료윤리지침은 무의미한 치료 중단은 「소극적 안락사」가 아니라고 주장했지만 언론 보도는 대개가 이를 「소극적 안락사 허용」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대개의 일반 시민들 역시 이를 소극적 안락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생명경시로 이어져선 안돼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여론과 현실을 보면 문제는 심각하다. 의협 윤리지침 발표 후 이어진 거센 반대와 논란에도 불구하고 실상 여론 조사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찬성 의견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국 갤럽이 지난 5월10일 전국 성인 10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전화 조사 결과를 보면 「소극적 안락사」의 범주에 해당하는 질문에 찬성(76.5%)이 반대(23.3%)에 비해 훨씬 많았다. 더군다나 「적극적 안락사」에 해당하는 질문에도 찬성(68.9%)이 반대(30.8%)보다 높았다.
대한의학회의 지침이 나오자마자 종교계에서는 진료 중단 결정을 의사가 자의적으로 판단할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인간 생명이 실용적으로 판단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생 불능 환자에 대한 치료 중지가 윤리적으로 허용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포기를 결정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을 적용하는데 있어서는 매우 어려운 현실적인 문제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회복 불능 판정」에 오판이 있을 수 있고 그 과정에 「고의성」이 개입된다면 결국은 인간 생명 경시 풍조가 야기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의사의 전문적인 지식과 올바른 양심의 판단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보다 엄격하고 철저하게 결정의 과정을 진행할 수 있도록 병원 윤리위원회의 강화와 활성화를 포함한 제도적인 장치가 반드시 완비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보다 인간다운 죽음을 지향한다면 안락사를 선호하기보다는 임종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제도를 활성화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라는 지적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안락사를 선호하기보다는 임종환자가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호스피스 제도의 활성화에도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합성 사진 중 인터넷 창에는 안락사 동의 여부를 묻고 있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 가톨릭교회 입장
소극적·적극적 안락사 모두 반대
가톨릭 교회의 안락사에 대한 이해는 무엇인가.
가톨릭 교회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안락 살해」로서의 안락사는 『결코 인간의 살해를 용납할 수 없다』는 대원칙 하에서 명백하게 안락사를 반대한다. 하지만 교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안락사에 해당하지 않는 행위들을 지적한다. 즉 ▲간호, 보편적 투약, 환자와의 대화 등 말기 질환의 고통을 덜어주는 배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 특정한 의료 행위의 포기 ▲생명 단축의 위험이 있으나 고통을 경감시켜주기 위한 행위 등은 안락사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도 죽음을 피할 수 없을 때 단순히 죽음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은 치료라고 할 수 없기에 예외적인 치료 방법을 중단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통상적인 치료 수단은 당연히 계속되어야 한다. 따라서 안락 살해가 아니라 회복 불능 환자에 대한 치료 중지는 윤리적으로 양심 안에서 허용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의협윤리지침의 관련 규정이 이러한 개념이라면 그것은 정당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침과 의료계가 의도하는 것이 다분히 인간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철저하지 못한 의식이 개입돼 있거나, 또 그러한 규정의 실시 이후에 야기될 부작용에 대해 철저하고 투철하게 대비하고자 하는 자세가 결여됐을 경우 이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