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6일, 중증 장애인 재활 시설 「무지개 가족」에선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도 웃음 가득한 아침이 시작됐다. 오늘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온가족이 모이는 날. 지난 84년 처음 만난 지정환 신부와 무지개 가족들은 각자가 재활치료 후 자립을 하더라도 2000년도 5월 23일 지신부의 영명축일에 함께 만나기로 약속했다. 어느덧 시간은 빠르게 흐르고 온 가족이 함께 자리한 지 벌써 3년째.
특히 올해는 23일 영명축일과 같은 날 지신부가 호암상까지 수상해 기쁨이 몇배로 더해졌다. 시상식 때문에 올핸 26일에 온가족이 함께하는 잔치를 마련했다. 무엇보다 무지개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는 지신부가 가족모임 날짜와 겹쳐 시상식에도 참가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호암상」은 호암 이병철 선생 사회공익 정신을 이어받아 학술, 예술 및 사회발전과 인류복지증진에 크게 공헌한 이들을 포상하기 위해 제정된 상. 지정환 신부는 지난 40여년 간 가난한 농민들의 생활 개선과 장애인들 재활에 헌신한 공로로 사회봉사상을 수상했다.
반백의 머리와 수염, 푸른 눈이 유달리 한복과 잘 어울리는 벽안의 신부.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적인 이 벨기에인 신부는 58년 서품 후 가난한 나라를 위해 몸바치겠다며 한국을 찾았다. 가난한 농민들의 자립을 위해 정신없이 뛰던 중 지정환 신부는 다발성 신경 경화증으로 하반신 불구가 됐다. 본국으로 돌아가 재활 치료를 했지만 한국을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장애인들과 한 가족을 이뤘다.
지정환 신부에게 무지개 가족들은 타국민도 타종교인도 아닌 사랑하는 한사람 한사람일 뿐이다. 성치 않은 몸, 연이은 시상식 등의 행사로 무척 고단할 터인데도 지신부는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과 손님들을 일일히 반갑게 맞는다. 다정하게 안아주며 양볼에 입맞춤을 해주는 프랑스식 인사는 가족들에게 해주는 특별 인사. 식사 중에도 목발을 짚고 가족들 사이를 다니며 챙겨주기 바쁘다.
『호암상을 받은 여러분들 축하드립니다』
지정환 신부는 가족들이 마련한 작은 축하의 자리에서 가족들의 상을 자신이 그저께 대표로 받아왔다고 말했다. 무지개 가족들, 봉사자들, 전주교구 사제, 수도자, 신자들 모두의 노력으로 받은 상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불편하지만 서로를 먼저 배려하는 따뜻한 손길, 주고받는 환한 미소, 그들 사이의 가족애는 그 무엇보다 깊게 느껴졌다. 전북 완주군 소양면 푸르디 푸른 산이 휘휘 돌아 감긴 가운데 자리잡은 「무지개 가족」 그들 사이에는 재활의, 사랑의, 희망의 무지개가 밝게 떠올라 있다.
누운 장애인은 앉게, 앉은 장애인은 서게 하는 신부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르스테반 Didier t」Serstevens) 신부는 59년 12월 한국에 첫발을 디뎠다. 타인을 위한 봉사에 그 누구보다 큰 열정을 보이는 지신부. 그는 전쟁 후 폐허와 다름없는 가난한 농촌에서 간척사업을 통해 농민들에게 삶의 터전을 마련주는데 힘썼다. 64년 임실본당 주임을 맡으면서부터 우리나라 최초로 치즈를 만들고 공장을 세워 지역 농민들에게 자활의 기반을 제공하고 신용협동조합의 활성화를 위해 애쓰는 등 국적과 종교를 초월해 사랑은 40년도 넘게 이어져왔다. 지금도 우리나라 최고급 치즈로 손꼽히는 임실 치즈를 생산하는 공장은 어느 정도 수준에 오르자 조합에 넘겨줬다. 그리고 전주교구에서 처음으로 맡은 장애인 사목. 전주 시내 28평짜리 아파트에서 장애인들과의 생활을 시작했다.
지신부는 『그 어떤 약물보다 운동이 재활의 최우선』이라고 말한다. 주변 사람들보다 정작 장애인 자신이 운동을 더 귀찮아하고 또 괴롭히는 것으로 오해할 때 가장 힘들었지만 지신부는 꾸준히 「생활 안의 운동」을 강조해왔다. 지금은 자립해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한 장애인은 침대에서 혼자 앉을 수 있을 때까지 7여년이 걸렸다. 그리고 휠체어까지 혼자 이동하는데 꼬박 12년이 걸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지정환 신부는 『누운 장애인은 앉도록 앉은 장애인은 휠체어로 움직이도록 다시 휠체서에서 설 수 있도록 돕는다』며 『그들이 「스스로」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무지개 가족을 거쳐간 장애인은 150여명, 그중 결혼한 이도 20여명이나 된다. 종교가 서로 다른 가족들도 절대 개종을 강요하지 않는다. 세례와 혼배성사 등도 각자 본당으로 돌아가서 하게 한다. 무지개 가족은 잠시 머무는 세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농민과 장애인을 돌본 일 외에도 지신부의 활동 영역은 꽤 넓다. 1990년대 전주교구의 전산화 작업을 주도한 사람도 지정환 신부. 교구 사회복지시설들을 후원하는 「사랑의 다리」의 운영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본당용 프로그램 등 각종 프로그램들을 개발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많은 지역과 단체에서 응용해 활용하고 있다. 교구 내 교적 정리도 장애인들이 전부 했다. 당시 한명 입력을 하면 100원의 수고비를 받았는데 장애인들은 그중 반을 무지개 가족 운영비로 자발적으로 내놓기도 했다.
2년 전엔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프랑스 선교사들의 편지 등을 정리해 CD롬으로 제작했다. 최근엔 1860년대 박해시대 그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다양한 자료들을 정리하고 있다. 이 자료는 교회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지정환 신부가 가장 관심을 가지고 추진하고자 하는 일은 장애인 교육. 그는 『사회생활에 많은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들이 제대로 자립하려면 실력이 최우선』이라며 호암상 수상으로 받은 상금 1억원은 전액 장애인 교육을 위한 장학금으로 활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처음 한국에 와서는 식사 후 주교님께 『너 잘먹었니?』라고 물어 주변 사제들에게 질타를 받은 웃지못할 경험도 있었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한국적인 지정환 신부. 흔히들 국적과 종교를 초월한 사랑을 실천했다고들 칭찬하지만 지정환 신부에게는 이러한 말은 큰 의미가 없다. 매순간 충실히 예수님의 사랑 그 자체를 실천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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