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8년 10월 10일 수원교구 제2대 교구장 김남수 주교의 사제수품 50주년의 금경축 축하 미사에 참석한 후임 최덕기 주교는 참 사제로서 깊은 신앙과 열정을 지닌 노사제의 삶을 경축했다.
최주교의 축사대로 김남수 주교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고 사제로서의 거룩한 소명에 평생을 성실하게 응답해 온, 우리 시대 참 목자의 모범을 보여주고 세상을 떠나 하느님과 하나가 됐다.
주교직 수행의 다짐을 담은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사목 표어대로 고(故) 김남수 주교의 삶은, 하느님의 양떼를 하나로 일치시키고 갈라진 남북의 형제들이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며, 아시아와 세계로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생명의 하느님을 우리 가슴에 되찾게 해주려는 노력으로 일관한 생애였다.
가장 큰 기쁨은 평사제로서의 삶
김주교는 금경축을 맞은 1998년 가톨릭신문과 가진 인터뷰에서 평생의 사제 생활 중에서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의 순간은 『죄인의 회두를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평사제로서 고백소에 앉아 있을 때 누구도 느낄 수 없는 희열의 순간을 수없이 맛보았다고 회고했다.
그 때문인지 김주교는 자신의 사제 생활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부산교구 양정본당과 서면본당에서 사목을 하던 9년간이라며 그 시기가 『가장 빛나는 시절로 보람 있었고 신명나게 잘 살았다』고 말했다.
어려서부터 격변의 시대 상황 속에서 사제의 길을 향해 걸었던 김주교는 중국 땅에서 태어났다. 그가 훗날 중국과 북한을 포함한 북방선교를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했던 그 먼 배경을 여기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중책 도맡아
탁월한 재능과 열정을 지닌 사제였던 김주교는 평범하지만 목자로서 가장 행복한 일선 사목자의 자리를 떠나 시대가 요청하는 중책들을 수행해야만 했다.
1966년 한국인신부로서는 처음으로 주교회의 사무총장직을 임명받아 1973년까지 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그에 따른 교회 쇄신의 바람을 실무자로서 주도했고 시복시성을 비롯한 중차대한 일들을 맡아야 했다.
1974년10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주교로 임명된 김주교는 제2대 수원교구장으로 부임한다.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는 사목 표어는 민족의 시대적 상황과 한국교회가 짊어질 미래의 소명을 담은, 「일치」를 향한 자신의 염원이었다.
수원교구장으로서 김주교는 당시만 해도 가난한 교구였던 수원교구를 성장시켜 1988년 교구설정 25주년에는 더 이상 외국의 원조를 받지 않고 받은 도움을 이제는 가난한 교회에 되돌려 갚을 것을 선언했다.
이처럼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발전하는 외적 표지의 하나로서 「한국외방선교회」를 창설한 것은 김주교의 큰 업적 중 하나이다. 1975년 2월 주교회의에서 정식으로 창설이 결의됐고 김남수 주교는 최재선 주교, 정진석 대주교에 이어 제3대 외방선교회 총재를 맡았다.
북방선교, 필생의 과업으로 추진
김주교가 외방선교회 육성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바로 아시아 복음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시아 복음화, 특히 13억 인구를 지니고 한국교회 복음화의 뿌리가 됐던 중국교회와 한 핏줄이면서도 갈라져 있는 북녘 땅의 형제들을 포함한 북방 선교의 절절한 염원은 김주교의 필생의 과제였다.
회고록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에서 김주교는 『이제 나는 13억 인구의 중국교회에 대한 생각 밖에 없다. 교황 성하께서 내 사표를 빨리 수리해주신 것도 내가 북방 선교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있음을 아셨기 때문』이라고까지 말했다.
수원교구장으로서 수원신학교의 설립은 사제 양성에 대한 김주교의 각별한 관심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설립과정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신학교는 교구 발전의 요람이 됐고 사제 성소 증가에 큰 역할을 했다.
김주교는 또 103위 순교 복자들의 시성운동 책임을 맡아 불과 8년간의 짧은 기간으로 마침내 1984년 한국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직접 시성식을 집전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주교의 업적 중에 일견 엉뚱한 듯하면서도 생명의 하느님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보여준 것이 바로 「아이 낳기 운동」이다. 견진 강론 때면 어김없이 아기 낳기에 대해 강조했다. 『적어도 셋은 돼야 신부 하나, 수녀 하나를 만들고 하나는 데리고 살 수 있다』는 것이 강론의 요지였다.
그래서 수원교구에는 견진 기념으로 낳은 아기가 많고 출산율과 유아영세율이 다른 교구에 비해 단연 으뜸을 차지한다. 금경축 행사 때에는 자신의 권유로 낳은 아기 100여명이 함께 참석해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김주교는 한국의 9번째 방인 수도회인 미리내 성모성심수녀회,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 창립에 대해서도 남다른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나는 행운아”
김주교는 항상 스스로 『나는 행운아』라고 믿고 살아왔다고 한다. 여섯 살 때 신부가 되기를 희망했고 여덟살 때 선생이 되기를 희망했으며 두 가지 소망을 모두 이뤘기 때문이다. 사제로 은경축을 지냈고 주교로 불리워 사제서품 50주년 금경축을 맞았고 주교서품 25주년 은경축까지 지냈으니 이처럼 행복한 사람은 흔치 않다는 것이다.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유언처럼 남겨둔 당부가 우리의 가슴에 생생하게 남는다.
『나는 이제 하느님께서 부르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나와 함께 일을 이루는 모든 사람들도 하느님의 섭리에 순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을 돌이켜보면 일의 계획은 내가 했어도 완성은 하느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낍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 어려운 일을 「나」라는 도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하셨습니다. 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니까 그분의 섭리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회고록 「모두 하나가 되게 하소서 中에서).
▲ 김남수 주교가 최덕기 주교의 수원교구장 착좌식에서 목장을 건네주고 있다.
▲ 주교 서품식 후 신자들에게 첫 강복을 주고 있는 김남수 주교.
▲ 김남수 주교가 주교 서품식 때 당시 청주교구장 이던 정진석 주교로부터 안수를 받고있다.
▲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 행사에서 김남수 주교가 자신이 주창한 「아이 낳기 운동」으로 세상에 태어난 화동들로부터 축하 꽃다발을 받고 있다.
김남수 주교 약력
▲1922. 6. 4. 만주 간도성 연길현 다조구 대령동 멍개골에서 출생 ▲1930 ~ 1934 대령동 해성 초등학교 ▲1935 ~ 1936 수원 신풍 초등학교 ▲1937 ~ 1943 함남 덕원 신학 중 고등학교 ▲1943 ~ 1945 함남 덕원 신학대학 철학과 ▲1945 ~ 1948 함남 덕원 신학대학 신학과 ▲1948. 4. 3. 부제 수품 ▲1948. 10.17. 사제 수품 ▲1948. 12. 1. 월남 ▲1948. 12.20 ~ 1949. 8.20. 서울대교구 천주교 혜화동 교회 보좌 ▲1949 ~ 1952 이탈리아 로마 우르바노 대학 교리신학과 (박사학위) ▲1951 ~ 1953 이탈리아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 사회학과 ▲1953 ~ 1957 왜관 순심중 고등학교,경북대학교, 효성여자대학교 강사 ▲1955 ~ 1957 왜관 순심고등학교장 ▲1957 ~ 1960 부산교구 천주교 양정 교회 주임 ▲1960 ~ 1966 부산교구 천주교 서면 교회 주임. 부산교구 가톨릭 학생회 지도신부. 부산교구 J?O?C. 지도신부 ▲1960 ~ 1967 부산 대양중 고등학교장 ▲1966 ~ 197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1971 ~ 1975 서울 가톨릭대학교 강사 ▲1974. 10.14. 천주교 수원교구장 임명 ▲1974. 11.21. 주교 수품, 천주교 수원교구장 착좌 ▲1975 ~ 1981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부의장 ▲1975 ~ 198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전례위원회 위원장 ▲1975 ~ 198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성서위원회 위원장 ▲1976 ~ 1984 한국 순교복자시성운동 책임 주교 ▲1978 ~ 1984 한국 천주교 군종단 총재 ▲1979 ~ 1997 한국 외방선교회 총재 ▲1980 ~ 1984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위원장 ▲1981 ~ 1984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교리주교위원회 위원장 ▲1981 ~ 198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총무 ▲1984 ~ 198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1984 ~ 1987 한국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담당 주교 ▲1985 ~ 1996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선교위원회 위원장 ▲1987 ~ 1993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1996 ~ 1997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선교사목주교위원회 위원장 ▲1997. 6. 4. 은퇴▲2002. 6. 1. 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