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간의 생명은 전지구보다 무겁다』
슈바이처사와 엠네스티 일본지부가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5월 29일 오후5시30분 동경 아카사카 세료회관에서 개최한 헬렌 수녀 초빙 강연회는 일본 내 사형폐지운동의 현재와 아시아지역 사형폐지운동의 방향성을 확인케 한 자리였다.
한국 주교회의 정평위 사형제도폐지위원회 상임위원을 비롯한 한?일 두 나라의 사형제도 폐지운동 관계자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Dead Man Walking No More」를 대주제로 열린 이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사형제의 부도덕성을 역설하고 사형 폐지에 한 목소리를 냈다.
「후쿠오카 사건의 진실을 어둠 속에 묻지 마라」를 주제로 시작된 제1부와 「사형 없는 21세기를 향하여」를 주제로 한 제2부로 이어진 이날 행사에서 참가자들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되는 사형제도의 허구성을 확인하고 국제적 연대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해냈다.
「둥근달이 깨질 때까지 외치고 싶다」는 부제가 붙은 제1부에서 일본의 사형제도 폐지운동 관계자들은 제도적이고 정치적인 압력으로 인해 이어져오고 있는 일본 내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짚고 국경을 뛰어넘는 연대와 공동활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이들은 인간 몰이해의 산물로 고착화되어 있는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에서의 사형제도가 폐지되기 위해서는 보다 적극적인 대안 마련이 필요하다는데 마음을 모았다.
이어 「한 인간의 생명은 전지구보다 무겁다」를 부제로 단 2부에서는 주교회의 정평위 총무 이창영 신부가 초청강사로 나서 한국의 사형제도 폐지운동 현황을 소개하고 「죽음의 문화」인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힘을 모아 나갈 것을 역설했다. 이 신부는 「사형은 살인이다. 사형제를 종신제로」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사형제도는 그리스도교적 인간관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로써 분명 사회 속에서 사라져야 할 제도적 폭력이며 살인행위』라고 강조하고 『「하느님의 영광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가르침에 따라 반생명적인 장치나 제도를 과감히 혁파해 생명존중의 문화로 바꿔나가자』고 호소했다.
▲ 주교회의 정평위 총무 이창영 신부가 초청강사로 나서 한국의 사형제도 폐지운동 현황을 소개하고 「죽음의 문화」인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힘을 모아 나갈 것을 역설했다.
헬렌 수녀는 특히 『사형폐지 캠페인은 단순히 사형제도로 고통을 받는 이들 뿐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사랑과 희망과 기쁨을 줄 것이라고 확신한다』며 『겨자씨가 자라나 큰 나무를 이루듯 각자가 삶의 현장에서 제 몫을 찾아나간다면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세상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이 행사에 참가한 두 나라 관계자들은 아시아지역 사형폐지운동에 있어 한.일 양국 활동가들의 몫을 확인하고 앞으로 보다 활발한 교류와 연대를 통해 지혜를 모아 나가기로 했다.
■ 헬렌 프리진 수녀 인터뷰
“사형은 하느님 모독 행위”
▲ 헬렌 수녀
헬렌 프리진(Helen Prejean.62.미국 성요셉수녀회) 수녀는 인터뷰 내내 아무리 흉악범이라고 할 지라도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5명의 사형수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본 헬렌 수녀의 눈빛은 쉽고 편하고 이기적인 사랑에 쉽게 눈길이 쏠리고 마는 우리들의 가슴에 조그만 반란의 씨앗을 심어주려는 듯 잔잔하면서도 강렬했다.
개봉 당시 전세계적으로 사형제도에 대한 근본적인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새로운 「깨달음의 비수」가 되어준 화제의 영화, 그 영화같은 삶에서 현실로 성큼 더 나아가 있는 그가 「회개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사형제도는 비인간적」이라며 쏟아내는 말은 생명의 무게마저 실렸음인지 아프기까지 했다. 「패트릭 소니어(Patrick Sonnier)」, 죽음 직전에 이르기까지 회개할 줄 모르는 가증스러운 모습 때문에 포기할 뻔했던 그 사형수로 인해 오늘 자신이 이 길을 걷고 있다고 거침없이 밝히는 헬렌 수녀, 그는 한 생명의 무게가 이토록 많은 이들의 삶을 변화시킬 정도로 무거운 것임을 재삼 강조한다.
사형집행장에 입회하며 사형수들이 보는 마지막 이 땅의 얼굴이 되고자 한 헬렌 수녀의 뜻은 죽음의 순간에라도 그들이 자신의 얼굴에 비치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종신형이라는 다른 대안이 있음에도 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는 것은 또 다른 죄악입니다』
1967년부터 사형집행을 유예해오다 1976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루이지애나주에 사형제도가 부활된 이후 지금까지 700여명이 사형판결을 받았지만 이 가운데 101명이 무죄로 판명된 현실을 들며 사형제도의 부조리함을 역설하는 헬렌 수녀는 사형이 고통을 종식시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고통을 낳는 아픔의 씨앗이라고 밝힌다. 특히 그는 사형선고를 받는 이들 가운데는 흑인 등 유색인종이나 슬럼지역의 가난한 이들이 대부분이라며 「정의가 아니라 돈」에 의해 생명이 좌우되는 현실을 「또 다른 불의」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비판했다. 「표」로 드러나는 일반인들의 선거행태가 정치인들조차 사형제도 폐지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고 말하는 헬렌 수녀는 요 몇년 사이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여론이 높아진 한국 사례를 전해들으며 반가움과 자랑스럽다는 뜻을 표시했다.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마다 않고 발걸음을 해온 그는 범죄피해자 가족들의 지원에도 주력하며 피해자들을 위한 조직도 설립해 활동하고 있다. 「사형은 폭력의 재생산이며 폭력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신념을 나누며 모두가 평화의 사도로 나서기를 기원하는 그는 이런 활동으로 지난 98년부터 3년 연속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 헬렌 프리진 수녀는?
미국 루이지애나 교도소에서 한 사형수의 죽음을 지켜본 체험을 영화화해 96년 아카데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데드 맨 워킹'(Dead Man Walking:사형수 입장)의 원작자이자 실제 주인공.
■ 일본 사형폐지운동 현황
사형폐지 찬성 한때 14.7%
독가스 사건후 8%로 내려앉아
일본 사회에서 「사형제도」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대부분의 종교나 인권단체가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기본적인 공감대를 지니고 다각적인 활동과 연대를 꾀하고 있는 것에 비해 일본에서는 전국적인 단체나 활동도 미약한 실정이다.
일본 전역에 조직망을 지니고 전국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대표적 사형제도 폐지운동 단체는 「사형제도 폐지 국제조약 비준을 위한 포럼 90(포럼 90)」과 1994년 100명 안팎의 국회의원으로 설립된 「사형폐지를 추진하는 의원연맹」 정도다.
「엠네스티 일본지부」를 비롯해 「사형폐지 연락회」, 「사형제도를 없애는 여자연락회」, 「사형제도를 생각하는 변호사회」 등 5개 시민단체 및 NGO가 1989년 네트워크를 형성해 발족한 「포럼 90」은 사형제도 폐지를 위해 활동하는 가장 큰 단체로 50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500여명의 변호사와 국회의원 130여명을 비롯해 언론인, 학자, 종교계 인사 등이 참여하고 있다.
「포럼 90」이 발족하던 때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14.7%의 국민들이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정권을 잡고있던 자민당에 대한 지지도가 20% 이하로 비슷했던 것과 비교하면 결코 작은 수치는 아니었다. 이런 가운데 「포럼 90」 회원들은 이 여론지지층들이 일본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판단 아래 사형폐지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포럼 90」이 처음으로 전국적 집회를 가진 90년 12월에는 한국사형폐지운동협의회 회원들도 동참해 연대활동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포럼 90」은 이후 다양한 집회를 통해 사형제도 폐지를 위한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고 법무부장관 면담, 광고 게재 등을 통해 정부에 압력을 가해왔다.
이같은 활동 결과 일본에서 사형제도가 시행된 이래 처음으로 1989∼1993년 3월까지 3년4개월이란 기간동안 사형집행이 정지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매년 적게는 2명에서 5명 안팎이 사형집행되던 전례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이 기간 동안 법무장관이 무려 4번이나 바뀌며 그 어느 때보다 사형집행의 확률이 높았음을 감안하면 「포럼 90」의 활동 성과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95년 3월 옴교의 도쿄 지하철역 독가스 살포사건으로 여론이 돌아선 이후 지금껏 사형제도 존치론이 대세를 형성하고 있으며 현재는 폐지 여론이 8%대에 머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