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복음은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세리란 정부로부터 어느 구역의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사들인 징세 청부업자를 가리킵니다. 이들은 어느 구역의 세금 징수 권한을 정부에 돈을 내고 임대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항상 여러 가지 비리가 개입될 소지가 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정해진 것 이상의 세금을 거두어 들여 일부는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치부하기도 하고, 또 일부는 다음의 안정적 임대를 위해 임대권자에게 상납하기도 하고, 또 세금 징수를 위해 로마의 힘을 빌리지 않을 수 없었기에 여기에는 권력과 유착한 여러 가지 비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직업상 죄인으로 취급하면서 로마의 협력자요 조국을 팔아먹는 매국노로 손가락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에서는 이러한 세리들과 함께 하는 것 자체가 부정을 타는 일로 여겨졌고, 경건한 이들은 이들을 멀리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예수님은 마태오라는 세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심으로써 그들과의 친교와 우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이러한 모습은 당시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조금은 경건하다고 여기는 모든 시대의 종교인들에게도 충분히 추문이 될 수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에 죄인을 받아들이는 문제는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모든 신앙인들의 머리에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세리를 제자로 택하시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통하여, 그리고 당신의 열두 제자들의 신분을 통하여 교회에 속한 이들이 누구인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교회 안의 악인의 문제에 대답하는 저 유명한 가라지의 비유는 가라지는 인간이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추수 때까지 함께 가지고 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통하여 교회는 항상 선하고 의인들만이 모이는 깨끗한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점은 우리가 「죄인」들이라고 단정 짓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소위 「죄인(?)」들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 가지는 가장 흔한 태도는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면서 그들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시 죄인 중의 죄인인 세리에게 당신의 제자됨을 요구하면서 그와 함께 식사를 하셨다란 사실은 「그를 받아들임과 사랑과 친교의 나눔」이 회개의 요청에 앞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 되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하느님의 진정한 바람과 원하심은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사람들에 대한 자비와 사랑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 9장 13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원하는 것은 자비이지 제사가 아니다』(200주년 기념 신약성서)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비라는 말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는 동정심」으로 나타나고 「죄에 대해서는 용서」를 의미하거나 아니면 「두 사람을 결합시켜 주는 관계」를 의미하며 동시에 관계에 대한 「충실성」을 의미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는 인간이 신과의 화해를 목표로 드리는 가장 기본적인 신심행위를 대표하는 신앙의식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사가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당시 이스라엘의 경건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의식적인 종교행위와 율법의 철저한 준수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과 세리와 함께 하는 모습은 하느님이 진실로 원하는 것은 의식적인 경건보다는 죄와 죄인들에 대한 자비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자비와 사랑」의 실천에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너무나 평범한 사실이지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너무나 자주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진리에 대한 재확인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위해 종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종교가 필요하다』라는 격언을 떠올리면서 『경건으로 형제애를 형제애로 사랑을 보여 달라』(2베드 1,7)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으로 오늘복음을 묵상해 보고 싶습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