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니스트라고도 불리우는 마리아회는 1817년 샤미나드(Guillaume Joseph Chaminade, 1761-1850) 신부가 개인의 성화와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프랑스 보르도에서 설립한 수도회로 이탈리아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1761년 4월 8일 보르도 동북쪽 70마일 거리에 있는 소도시 페리구(Perigeux)에서 태어난 마리아의 위대한 사도 윌리암 요셉 샤미나드신부는 15명의 자녀 가운데 열 네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아기를 거쳐 성장한 아이는 그 중 불과 여섯명, 그 여섯 중에 4명이 사제가 될 정도로 신심이 두터운 가정에서 성장했다. 맏형은 예수회, 동생 한명은 프란치스코회, 그리고 샤미나드신부는 다른 또 한 명의 형제와 함께 교구 사제가 됐다.
1789년 프랑스는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프랑스 교회는 모두 국유화됐고 정부는 모든 성직자들이 「성직자 공민헌장」에 따라 교황청과 분리되어 국가적 기반위에 새롭게 구성되는 교회에 속하도록 선서를 요구했다.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비선서 성직자」로 남아 땜장이로 변장해 지하에서 성무활동을 계속하다가 1797년 스페인의 사라고사로 망명했다. 이곳에서 그는 물질주의와 세속주의에 대항하며 마리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할 마리아 신심회와 남녀 수도회 설립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 1800년 망명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샤미나드신부는 1802년까지 바자 교구의 교구장 직무를 대행하다가 사라고사에서 계획했던 것을 실행에 옮겨 그해 12월 8일 마리아 신심회를 조직했다.
마리아 신심회는 이전과는 달리 신분, 나이, 성별에 관계 없이 교육, 자선사업, 불우청소년 돕기, 양서 보급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후 신심회원들 중에서는 수도생활을 희망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마리아의 사도를 세상에 파견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던 샤미나드 신부는 마침내 남녀 수도회의 설립을 추진해 1816년 5월 25일 「티없으신 마리아의 딸 수녀회」를 아장(Agen)에서 설립했고 이듬해 10월12일에는 보르도에서 마리아회를 설립했다.
▲ 창설자 샤미나드 신부의 시복식 장면.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초창기, 어떤 활동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확고한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수도회가 그릇된 출발을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던 샤미나드 신부는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목표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는 것이었다.
당시 혁명 후 프랑스에서는 교육문제가 가장 큰 것 중 하나였다. 아장에 무료학교를 개설하는 것으로 시작한 샤미나드 신부는 교사를 사도적인 교육자로 양성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전교방법이라고 생각해 마리아니스트가 있는 곳에서 사범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39년 마리아회는 스위스에 첫 진출하고 1849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도 진출해 교육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아시아에는 19세기 말엽부터 진출하기 시작해 1888년 1월 5일 일본 요코하마에 진출, 전국에 5개의 명문학교를 설립해 관심을 불러왔다.
1850년 1월 창설자인 샤미나드 신부는 병석에 누워 거룩한 삶을 마감하게 된다.
마리아회는 1865년 8월11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공식적인 승인을 받고 1891년 7월24일 교황 레오 13세에 의해 회헌에 대한 최종 인가를 받았다. 오늘날 마리아회는 한국을 비롯해 스페인, 이탈리아, 벨기에, 일본, 인도, 아르헨티나, 칠레, 스위스 등 전세계 32개국에서 2000여명의 수도자들이 믿음과 마음의 가난, 그리고 주님께 귀 기울이신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교육 사업을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사도직활동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