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가 태어난 곳은 두만강 인근에 있는 함경북도 경흥(慶興)군 경흥읍이다. 일제시대 부친은 공무원 즉 군청 서기로 일했다. 당연히 전근이 잦았던 아버지는 1923년 5월 24일 내가 태어나던 시기에 경흥군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 이름도 돌림자 「종」자에 경흥에서 「흥」자를 따 「종흥」이 됐다. 증조모님이 신앙을 받아들였으니 나는 4대째 신앙가문에서 태어난 셈이다.
당시 경흥에는 신자집이 우리집 뿐이었다. 내가 태어난지 1주일이 되었을 때 원산 신대주교와 백신부(뒤에 연길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주교가 됨)가 우리집에 들러 하룻밤 묵게 됐다. 연길지목구 설정 때문에 훈춘으로 가던 길이었다. 집에서 미사를 드리고 백신부는 나에게 「그리산도」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주었다. 세례기록은 만주 육도구성당에 남기고, 덕원 수도원에 사본도 보관되었다.
기억할 수 있는 어린시절은 6살 때 쯤부터이다. 전근을 다니시던 아버지는 강원도 김화(金化)에서 폐병을 얻어 퇴직할 수 밖에 없었다. 안변 서광사 산방약수터 부근에서 1년쯤 요양하다 차도가 없자 고향 이천으로 돌아와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 그 때가 내 나이 6살 때였다. 누나마저 같은 해에 죽고 어머니와 세살 위 형, 그리고 나 이렇게 세식구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힘들었던 세파를 견뎌야만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이듬해 이천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 때 쯤 저수지가 나는 바람에 집을 처분했고 삼촌집에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6학년 봄에 서울대목구장이었던 원아드리아노 주교가 견진을 주러 왔다. 처음 보는 외국인이었다. 눈이 새파랗고 수염도 길고 얼굴 생김새도 달라 이상했다. 인사를 하니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뜸 노래를 불러보라 했다. 어쩔수 없이 노래를 하고 나니 『야! 노래 잘한다』며 똑똑해 보이는데 신학교에 갈 마음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신학교의 「신」자도 모르던 시기라 아무 말도 못하고 서있었다. 견진을 주고나서 원주교는 나의 뺨을 두드리며 『잘 기억해라』고 말했고, 송별식 때도 『잘 생각해봤느냐』 『꼭 믿는다』며 누차 확인했다. 그후 본당신부도 『주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신학교에 갈)생각이 없느냐』고 몇번이나 확인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부르심이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위장병으로 3년동안 집에서 쉬면서도 「신학교 가야한다」는 생각 뿐이었다.
▲ 대구선목신학대학 초대학장을 거쳐 200주년 기념준비위원장으로 일하면서 1984년 5월 5일 대구를 방문한 교황을 영접했다.
일제의 횡포가 극에 달했던 시절 공출 징병 정신대 학도병 등으로 어수선한 가운데 군사훈련도 극심했다. 하루 3홉의 잡곡이 배급으로 나왔다. 한끼에 1홉, 두 숟가락 떠고나면 물로 채워야 했다.
쇳덩이도 삯인다는 나이에 한끼 1홉으로 배를 채우고 일반 학과 공부에 신학 공부, 엄격한 신학교 생활과 혹독한 군사훈련이 매일 반복됐다. 앞에서 옆에서 뒤에서 쓰러지고 졸도하며 나자빠지기가 허다했다. 아무튼 자나깨나 먹는 것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요즘도 음식 남기고 낭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천벌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울 신학교에는 덕원 관할을 제외한 전국 각지에서 신학생으로 선발된 이들이 모여 살았다. 강원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지서 모여든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독특한 기질과 사투리로 부대껴야만 했다.
특히 경상도 억양은 어떻게나 센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개중에는 얼굴색도 시커멓고 인상도 거칠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어려웠던 것은 식사 시간이었다. 8명이 한 상에서 밥을 먹었는데 밥상머리 예절이 엉망이었다. 배고픈 시절이었다고는 하나 맛있는 것이 나오면 먼저 먹기위해 허급지급했고, 제 앞에 끌어다 놓기 바빴으며, 국물이 나오면 건데기부터 먼저 건져먹기 일쑤였다. 기분 나쁘고 비위 상해 밥먹기가 쉽지 않았다. 특히 경상도와 전라도 학생들이 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렇듯 인상이 좋지 않았던 경상도(대구)에서 사제생활을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시기였다.
걸핏하면 싸우고 주먹질이 예사였다. 비양심적인 사람도 있었고 심지어 도둑질까지 하는 등 정말 별별 사람이 다 있었다. 연애편지를 주고 받다 들통난 사람도 있었고 이성문제로 탈락한 사람도 있었다. 가난하고 혼란한 시기라 신학생으로서의 자질 검정이 잘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던 말썽꾼들은 하나 하나 쫓겨나기 시작했다. 39명이 같이 입학했지만 나중에 신부가 된 사람은 11명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