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은 이날 시성식에서 비오 신부의 기도와 사랑의 삶을 찬양하면서 『오늘 탄생한 새로운 성인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하느님 앞으로 초대하며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유일하고 가장 숭고한 선익이 될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말했다.
비오 신부는 1968년 81세를 일기로 이탈리아 남부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 타계했다.
시성식에 참여하기 위해 성 베드로 광장을 찾아온 순례자들은 지금까지 바티칸에서 열린 어느 대회보다도 많은 수를 기록했는데 특히 섭씨 36도를 오르내리는 뜨거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새벽부터 몰려들었다.
시성식이 시작된 오전10시 전에 이미 3만5천석의 좌석과 2만1천여석의 입석이 모두 찼고 교황청에서 티베르강에 이르는 간선도로 등 바티칸의 주요 도로와 광장에는 3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 곳곳에 설치된 대형 화면을 통해 교황이 집전하는 시성식을 지켜봤다.
뜨거운 날씨와 많은 인파로 만일의 사고를 우려한 경찰과 구조 요원들은 도시 곳곳을 지키며 순례자들에게 75만여병의 생수를 시민들에게 나눠주었다.
교황은 오전10시25분경 흰색과 황금색의 제의를 입고 라틴어로 비오 신부를 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예식서를 낭독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462번째로 성인으로 탄생시킨 파드레 비오 성인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폭넓게 사랑받는 인물이다. 지금까지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에서 비오 신부의 영성을 바탕으로 하는 수만여개의 기도 모임들이 구성돼 있다.
이날 시성식에 함께 자리한 사람 중에는 비오 신부의 전구를 통해 병이 치유된 기적의 주인공들도 있었다. 1992년 불치병이 치유된 콘실리아 데 마르티노와 2년 전 회복 불가능한 의식 불명 상태에 빠졌던 10세의 어린이 마테오 코렐라가 그들이다. 전자는 비오 신부의 시복을 가능하게 했고 두 번째 어린이는 이번 시성식을 가능케했다.
교황은 비오 신부의 삶과 신앙을 개괄적으로 설명하면서 『기도와 사랑, 이것은 비오 신부의 가르침을 가장 구체적으로 요약하는 말』이라며 『비오 신부는 다시 한 번 오늘 이 자리에서 이 말들을 우리에게 가르친다』고 말했다.
한편 비오 신부가 선종한 곳인 이탈리아 산 조반니 로톤도에서도 비오 신부의 시성을 기념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비오 신부가 살았고 「고통받는 이들의 원조를 위한 집」을 설립했었던 이 곳에는 6만여명의 군중들이 몰렸다.
교황은 『이 겸손한 카푸친회 수도자가 살았던 십자가의 영성은 그 얼마나 시의적절한 것이었던가』라며 『오늘날 우리 시대는 희망을 향해 창을 열수 있기 위해서 그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은 미사를 마치고 삼종기도를 바치면서 비오 신부를 전례 안에서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라며 매년 9월 23일 그의 선종일을 기념해 해마다 미사 안에서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세계서 기념행사
파드레 비오 시성 기념 행사는 바티칸과 이탈리아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함께 펼쳐졌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라 피에다드 성당에서 비오 신부를 기리는 미사를 거행했고 필리핀에서는 시성식을 앞두고 목요일부터 삼일기도를 시작해 마닐라에서 거행된 미사로 그 절정을 이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비오 신부를 성인으로 선포하는 동안 인도의 투라 교구는 비오 신부에게 바치는 병원과 학교 건물을 축복했다.
챠드의 고아 교구에 있는 한 본당은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시고 9월에 설립될 예정인데 이 본당은 아프리카에서는 처음으로 비오 신부를 주보로 모신 본당이 될 예정이다. 지난 몇 주 동안 고아의 300여개 마을에서는 비오 신부의 기도와 생애를 담은 기도문을 배포해왔다.
전세계에 2700여개를 헤아리는 비오 신부 기도 모임의 사무총장인 마르씨아노 모라 신부는 『우리는 양심이 깨어나고 기도를 향한 열정이 솟아남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 6월 16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비오 신부의 시성식 장면. 이날 시성식에는 약 30만명의 신자들이 몰려 들어 성황을 이뤘다.
■ 성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 미사 봉사 기도로 유명
파드레 비오(Padre Pio, 1887 ~1968)는 1887년 5월 25일 이탈리아 베네벤토 대교구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파드레는 이탈리아어로 신부를 뜻하는 존칭이다. 비오는 그의 주보성인인 교황 성 비오 5세의 이탈리아어 이름으로 그가 수도회에 들어갈 때 새 주보성인의 이름으로 지은 수도명이다.
아버지 그라치오 포르지오네와 어머니 마리아 주세파 데 눈치오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태어난 다음날 세례를 받고 프란치스코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12살 때 견진성사를 받고 첫 영성체를 했다. 1903년 1월 6일 그는 모르코네에서 카푸친회에 입회했고 그곳에서 1월 22일 비오 수사로 불리기 시작했다.
1910년 8월 10일 베네벤토에서 사제로 서품된 후 1916년까지 건강상의 이유로 집에 머물러야 했다. 그해 9월 산 조반니 로톤도로 간 그는 거기서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비오 신부는 고해성사와 미사로 유명하다. 사회적인 봉사활동에 있어서 그는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집을 1956년 5월 5일 설립했다.
그는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책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도는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열쇠』라고 말했다.
50년 이상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오 신부의 사목활동으로, 그에게 받는 고해성사로, 그와 나눈 상담으로, 그리고 그의 위로로 의지할 바를 얻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오 신부는 언제나 자신을 쓸모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하느님의 은총의 선물을 받기에는 너무나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1971년 2월 20일 비오 신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교황 바오로 6세는 카푸친회 장상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가 얻은 명성을 보시오. 그분의 주위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시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철학자이기 때문에? 현명하기 때문에? 아니요. 그는 겸손하게 바치는 미사, 새벽부터 저녁까지 고해소에 머물고 주님의 상처를 자신의 몸에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기도와 고통의 사람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몇 년 동안 그의 성덕과 기적들은 거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카푸친회는 교회법에 따라서 비오 신부의 시복시성을 추진했다. 비오 신부는 이에 따라 1999년 5월 2일 시복됐고 지난 2월 28일 시성이 결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