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소신학교를 졸업하고 철학과 1학년이 되었다. 고향 이천 망답성당에서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데 해방을 맞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데 38선이 가로막고 있어 걱정이었다. 38선을 넘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나돌아 무섭기도 했다. 하루 하루 미루다 더 이상 미룰수 없다는 생각에 우리 신학생 8명은 서울로 향했다. 전곡(全谷) 한탄강에 다달아 정세를 살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소련군과 미군이 대치해있었기에 이들이 없는 틈을 타 재빨리 강을 건너야 했다. 그 때가 10월이라고 생각되는데 추위가 무척 일찍 찾아왔는가 보다. 살짝 얼어있는 강을 조심스럽게 건너기 시작했다. 『손들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소련군이 우리들 가슴에 총을 겨누고 있었다. 큰 해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머물며 군인들이 지키지 않는 다른 길목을 찾았다. 이번에는 성공. 38선 이남의 분위기는 북쪽에 비해 완전히 달랐다. 『자유다』라고 외치며 우리는 서울로 서울로 향했다.
그해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이었다. 소풍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형한테 들렀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 만남이 될줄은 꿈에도 모른 채. 형도 아버지를 따라 면서기를 했었다.
해방후 일제의 앞잡이라는 누명을 쓰고 혼자 서울에 와 살고 있었다. 형을 만나고 학교에 돌아와 자고있는데 교장 신부와 당가(재정담당) 신부가 조용히 깨웠다. 『밖이 추우니까 옷을 단단히 입어라』고 말하고 돈 3000원을 주며 『형이 쓰러져 있으니 빨리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고향에 어머니와 형수 조카들을 두고 혼자 외롭게 살던 형이 중풍을 얻어 의식불명이었다. 그나마 오진을 해 장질부사라는 진단이 내려졌고 전염병 전용 시립병원에 방치된 상태였다.
부랴부랴 병원에 찾아가니 인기척도 없는 암흑천지였다. 소리 소리 지르며 찾았다. 어스름 달빛 아래 작은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아! 세상에…』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도저히 여기 둬서는 안될것 같아 성모병원으로 옮겨야 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신학생이니까 도움을 좀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다.
꼼짝못하는 형을 옮기기 위해서는 인력거를 빌려야 했다. 밤중이라 겨우 인력거를 찾았지만 5000원을 내라고 했다. 가진게 당가 신부가 준 3000원뿐이라 통사정을 했지만 퇴짜맞았다.
어쩔줄을 몰랐다. 세상에 이렇게 의지할 곳이 없을까? 형의 목숨이 풍전등화에 놓였는데 내가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느님도 형과 내가 불쌍했던가?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형을 눕혀놓고 대성통곡하고 있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두드렸다. 지나가던 신사였다.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사정 얘기를 하니 나를 데리고 인근 파출소에 갔다. 『내일 아침에 돈을 줄테니 인력거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 지역의 유지였던지 경찰은 아무말 않고 인력거를 불러줬다. 힘들게 형을 싣고 2시간여 걸려 성모병원에 도착했다. 하지만 형은 치료를 받다가 죽고말았다.
신학교 생활이 힘들었다. 이북에 있는 모친과 형수, 조카들을 나몰라라 할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집 걱정에 하루도 마음 편할 날 없던 어느 날 또 죽을 고생하며 38선을 넘어 집으로 갔다.
하지만 내가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미 재산은 모두 몰수 당한 상태였고, 그렇다고 다 데리고 내려올 상황도 아니지 않는가.
어머니는 이런 나의 처지를 헤아리고 『우리는 알아서 살테니 서울로 내려가라』고 재촉하셨다. 다시 38선을 넘어왔다. 한번도 넘기 힘들다는 사선을 3번이나 넘어야 했다.
신학교 생활이 편하지 않았다. 집 걱정에 우울한 날이 많았다. 나만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했다. 이북 출신 신학생들은 38선이 그어진 뒤로 방학이 되면 갈곳이 없었다.
지금의 구산성지에 있던 구산공소에서 방학을 지내고 있던 어느날 신학교를 통해 북에서 모친이 오셨다는 연락이 왔다. 60 노인이.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었다. 반갑기야하지만 다시 올라갈수도 없고 서울 하늘아래 발붙일 곳 하나 없는 처지가 아닌가.
형이 객사하고 얼마후에 나도 치질에 걸려 두 주일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이 북에 흘러들어갔고 모친은 걱정이 돼 목숨걸고 내려온 것이다. 당장 그날 저녁부터 묵을 곳이 없어 신학교 빨래방에 거처해야 했다.
그후로도 수녀원이며 양로원, 사제관, 신자 집을 전전했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시절 입하나 늘어나는 것을 누구도 반길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와중에 모친은 옷가지를 도둑맡기도 하고, 심뽀가 고약한 사람들은 어머니를 일꾼으로 부려먹기도 했다.
내 머리 속에는 짐이 가득했다. 무슨 힘으로 그때의 삶을 견뎠는지 모르겠다. 요즘같으면 이런 상황에서 누가 신학교에 붙어있을까? 오로지 신부 된다는 일념으로 버텼지만 지금 생각해도 내 힘만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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