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나 안동 교구처럼 교세가 작은 시골 신부들의 어려움은 전출로 인한 신자들의 감소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필자는 2개월간의 보좌 생활을 마치고 운이 좋게도 새 신부 3개월만에 주임 신부로 가게 되었다. 그 곳은 주일 미사에 약 100명 정도가 참여하는 작지만 내 고향 정선과 같이 정이 많고 순박한 사람들이 사는 아름다운 농촌 성당이었다.
비록 신자 수는 많지 않았지만 새 사제로서의 기쁨으로 그러한 것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기에 열심히 강론도 준비하고, 그들과 함께 하려 하고 신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기 보다 먼저 내가 교회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하며 사제로서의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열심한 한 가정이 이사를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은 장년회 회장이고 자매는 레지오 단장, 그리고 자녀들은 복사를 하는 가정인데 이사를 간다는 것이다. 물론 큰 본당에서는 누가 가면 가고 오면 오는 구나 하겠지만 100명의 신자, 그 중의 대부분은 연세가 든 신자들이 있는 본당이라면 젊고 열심한 한 가정의 자리는 생각보다 너무나 큰 자리였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일이 사제가 되고 난 후 최초로 겪은 실망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러한 모습은 대부분의 농촌이나 탄광촌 신부들이 겪는 어려움이다. 열심히 예비신자를 영세 시켜 놓아도 1년이 지나면 전출자 숫자가 이러한 영세자의 수를 아무 의미 없이 만들어 버리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나 사제에게 지지를 보내 주는 사람들도 힘있고 존경받는 그럴듯한 사람들이 아니라 대부분 노인들과 순박한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리고 사제에게 보내주는 지지와 격려도 「자기 존재」 때문이 아니라 막연히 「사제」이기 때문에 지지해 주는 것 같은 느낌은 보통 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다가도 우울하고 힘들 때면 자기를 둘러 싼 이러한 환경은 그러한 기분과 더불어 사제직에 대한 실망으로 연결되곤 한다.
결국 이러한 주어진 환경에 대한 실망은 가끔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동경을 낳게 되는 또 다른 이탈을 가져올 수 있기에 정말 조심할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기도인데 이 기도의 배경을 살펴보면 너무나 슬프면서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큰 감동을 준다. 예수님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셨기에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있고, 그것을 「아버지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여기서 먼저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지도급 인사들, 율사와 바리새이와 사두가이파 등등으로 소위 하느님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회적인 부와 권력이 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린이」란 표현은 1차적으로 유아들을 의미하고(보통 7세 이하의 어린이) 이차적 의미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문맥으로 본다면 어리석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바로 사회적 약자요 비천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사람들 그리고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기도의 배경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 상황은 비참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의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이 때는 복음 전파 시초에 거두었던 화려한 성공은 온데 간데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데 비해 마지막까지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 곁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갈릴래아 사람들 몇 명과 몇 명의 여인들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인간적인 눈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복음 선포 사명은 분명 실패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을 따르던 소수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보고 드린 기도가 오늘의 감사기도인 것이다. 자신의 복음을 이해해주고 받아들인 숫자가 소수라는 사실도, 그리고 그들이 사회의 밑바닥 인생들이었다는 사실도 예수님에게는 실망의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의 이유가 되고 있는 것이다.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실망하고 자신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는 것이 당연할 상황에서 오히려 예수님은 실패에 눈길을 두는 것이 아니라 작은 성공에 감사드리고 그 안에 함께 하는 하느님의 뜻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기보다는 갖지 못한 것을 그리워하면서 현실과 자신의 둘러싼 환경을 비판하는 우리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되는 모습인 것이다.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보고 극한 상황에서 조차 감사 드릴 수 있는 여유」가 우리 신앙인들의 삶을 화려하게 수놓을 진정한 보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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