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1939년에 강원도는 서울교구에서 분리돼 춘천지목구 관할이 됐고 나도 지금의 춘천교구 소속이 됐다. 당시 춘천교구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담당하고 있었다.
1939년 소신학교 1년 여름방학을 맞아 고향에 가니 박우철(바오로) 신부는 떠나가고 없고 낯선 아일랜드 국적의 신부가 부임해 있었다.
한국인 신부가 있을 때는 신학생이 방학을 맞아 본당에 오면 주임신부가 생활지시를 하고 다독여 주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아일랜드 신부가 와서는 그런 관행이 무시됐다. 신학생이 본당신부를 만나려는 것을 귀찮아하는 눈치고, 신학생이라고 특별히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도 않아 방학때면 서먹서먹하게 지내다가 학교로 돌아가곤 했다.
이천본당 사제관은 100평이 넘을정도로 큰 건물이었다. 그래서 골롬반회 외국인 신부들이 많이 모여 살며 한국말을 배우는 장소가 됐다.
그러나 신자들과 상종하는 것은 싫어하는 눈치였고, 심지어 본당회장까지 찾아오는 것을 꺼리는 것 같았다. 본당 분위기는 삭막할 수 밖에 없었다.
1948년 시종직을 받은 해 겨울방학이 되자 나는 춘천 주교관에서 지내게 됐다. 당시 춘천은 계엄지구라 출입하려면 군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그래야만 기차표도 살 수 있었다. 어렵게 어렵게 찾아간 교구청이었지만 아무도 반기는 사람이 없었다.
구토마스 주교와 외국인 신부들은 자기들끼리만 얘기를 나눴다. 그나마도 영어를 사용하기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꾸어다논 보릿자루마냥 밥이나 얻어먹는 거지신세였다. 혼자 공부하기도 힘들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생각다못해 곰실공소 엄회장집에 신세를 지게 됐다. 지금도 그 고마움을 잊지않고 있다.
1949년 1월 어느날, 서울서 후배 신학생이 찾아와서 모친이 임종직전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정신없이 춘천역으로 달려갔다.
기차표를 살 돈도 없고 계엄군의 허가증도 없었지만 무작정 모친의 임종을 지켜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연히 표를 구할 수 없었다.
망연자실하고 멍하니 서있자니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서울 가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나니 『기다려라』고 말하더니 조금 있다 표를 구해왔다.
너무나 고마운 마음에 가진 돈이라도 주려고 주머니를 뒤지다 고개를 들어보니 사람이 없어졌다. 나에게는 하나의 기적으로 남아있는 사건이다. 하느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기차간에서 제발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모친이 살고 있던 삼각지에 도착해보니 연도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입관까지 마친 상태에서 나는 모친의 얼굴만 보고 장례를 치러야했다. 그때가 1949년 1월 24일이었다. 당시 모친의 머리카락을 잘라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큰 짐은 벗었지만 고통스러웠다. 지금도 한이 맺힌 것은 어머니를 병원에 한번 모시지 못한 것이다.
일제시대 남편과 딸을 잃고 재산은 몰수 당했으며 큰 아들마저 객사하는 불운을 겪은 어머니, 환갑 나이에 38선을 넘어와 의지할 곳이 없어 이곳 저곳 전전했던 어머니, 고생 끝에 쇠약해져서인지 숨이차고 몸이 붓고 해도 진찰 한번 받아보지 못한 어머니가 끝내 병명도 모른채 돌아가신 것이다.
이제 가까운 일가친척이라곤 형수와 조카 셋이 남았다. 형이 죽자 집안에서는 일제시대 여자 혼자 살기 힘들다고 형수를 재가시켰다.
모친이 서울에 온 1년뒤 형수도 가족들과 함께 38선을 넘어왔다. 먹고 살기가 힘들어 조카 둘이는 고아원에 보내야 했다.
6.25가 일어나 뿔뿔이 흩어졌고 살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형수는 1.4후퇴 때 재가한 남편마저 군에 끌려가야하는 불행 끝에 굶어죽었다고 한다.
전쟁후 원주 용소막에서 사목할 때 명동본당 장금구 신부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조카 둘이서 비참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군용 트럭을 얻어타고 어렵게 찾아갔지만 동냥하러 나간 아이들을 만날 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릴수 없어 아이들 계부에게 부탁하고 용소막으로 돌아왔다. 며칠후 조카들이 찾아 왔다. 1957년 유럽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이들을 직접 돌봐야 했다. 지금은 다들 잘 커줘 하나는 수녀가 되어 있고, 둘이는 결혼해 살고 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신학생의 신분으로 형의 객사를 지켜보았다. 어디 한 곳 의지할 곳없는 서울 땅에서 38선을 넘어온 어머니가 고생끝에 돌아가시고 전쟁통에 형수마저 굶어죽었다.
신부가 되어서는 버려진 조카들을 돌봐야했다. 돌아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역사였다. 지금 이렇게 신부가 되어 큰 부끄러움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보살핌이 없이는 불가능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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