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김대건 신부(1821∼1846)는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 반열에 오른 103위 순교자들 가운데 대표적인 성인으로 꼽힌다. 무엇보다 훌륭한 믿음과 성덕의 모범을 보여준 순교자이고 특히 「한국교회의 첫 사제」라는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대건 신부 대축일을 맞아 새로운 천년기를 살고 있는 우리 후손들에게 성인이 남긴 업적은 무엇인지, 그리고 생전의 활동들은 어떠했는지 다시한번 짚어보는 기회를 마련해 본다.
교회 사학자들은 김신부가 짧은 사제생활 안에서,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남겨놓은 활동을 「서간문 등의 저술활동」과 「조선 입국로 개척 노력」, 「서품 후 사목활동」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저술분야에서는 생전에 기술한 31통의 서한과 「훈춘여행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서한은 총 31개 중에서 9통은 압수되었으며 3통은 유실되고 나머지 19통만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19통의 서한은 라틴어 16통과 프랑스어 역본 2통, 한글 필사본 1통 등이다.
이 서한들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보관돼 오다가 2통을 제외한 17통이 1984년 한국교회로 이관돼 현재 절두산 순교기념관에 남겨져 있다.
서간문 중에는 김대건 부제가 서울에서 현석문(가롤로), 이재의(토마스) 등이 수집한 자료들을 바탕으로 라틴어로 쓴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를 발견할 수 있다. 1845년 7월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 첨부된 것으로써 「조선교회 창립에 관한 개요」,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 「1839년에 순교한 몇몇 주요한 순교자들의 생각」 등의 제목이 붙어있다.
사학자 차기진 박사는 이에 대해 『특히 「1839년 기해박해의 진상」과 순교자들 전기는 일단 기해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최초 정리 기록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전하고 있다.
1845년 서울에서 제작한 「조선전도」 역시 김신부의 저작활동 중 빼놓을 수 없는 업적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 지도는 1855년 프랑스 지리학회지에도 소개된바 있다. 김신부가 지도를 만든 이유는 조선을 외국 선교사들에게 소개하려는 목적이 컸고 또한 정확한 조선지도를 제작해 보려는 개인적 학문 욕구도 크게 작용한 것 같다는 것이 사학자들의 분석이다.
김신부의 조선입국로 개척은 조선의 서북방과 동북방, 그리고 서해 해로 등 세가지 방향에서 이뤄졌는데 서북방로 즉 의주 변문을 연결하는 입국로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기부터 이용된 것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조선교회 밀사들이 변장을 해 가장 애용하던 통로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서북방 동북방 모두 감시가 심해지면서 입국이 용이하지 않았고 마침내 페레올 주교는 해로를 개척하기로 결정, 김신부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그렇게 해로를 이용해 1845년 상해로 가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주교를 입국시키는데 성공한 김신부는 보다 정확한 「해로도」 작성을 시도했지만 체포됨으로써 이 작업은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김신부의 서품 이후 사목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한 연구 기록들이 없으나 「79위 시복조사 증거서」 등 순교자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김신부는 자신이 거처하던 서울의 돌우물골을 비롯 서대문의 미나리골 서강의 무쇠막 서빙고 남대문의 쪽우물골 용인의 은이 터골등지에서 성사를 집행한 내용이 밝혀진다.
서품 즉시 상해를 떠나 조선에 입국, 1845년 11월 서울에 도착한 김신부의 사목활동 기간은 고작 6개월에 불과했지만 여러장소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한편 선교기반을 마련하려 애쓰는 흔적들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첫 사목은 서울 석정동 돌우물골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이때 이의창이 김대건 신부를 도왔고 이후 김신부는 이의창 주선으로 여러차례 신자들을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에 있는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행함은 물론 용인으로 내려가 고향 골배마실에서 모친과 상봉하였고 이후 서울과 용인을 오가며 은이공소를 중심으로 미사를 봉헌하고 성사를 집전하였다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이렇게 6개월동안 서울에서는 미나리골 무쇠막 서빙고 쪽우물골 등지를 찾아다니며 성사를 주었고, 용인지역에서는 은이 터골 등지에서도 성사를 주었으며 경기도 이천까지도 방문했다. 김신부는 교리를 설명하고 교우들을 가르치는데 기쁨과 정성을 다하였고 또한 진지하게 성사를 집전한 것으로 회자되고 있다.
김신부의 사목활동은 체포된 뒤에도 감옥에서 옥중세례 등을 통해 계속 이어졌다. 1846년 7월 예비자 임군집과 다른 한명에게 옥중 세례를 주었고 남경문 세바스티아노에게는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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