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4월 15일 부제품을 받고 두달후 6.25가 터져 피난길에 올랐다. 한강을 건너 예산-청양-논산-목포-장성-광주-보성-진주-마산-부산까지 기차를 타거나 걷기를 반복했다. 부산 중앙성당에서 2개월여 피난생활을 하다가 9.28수복으로 대구에 와서 주교관에 머룰게 됐다.
때마침 대구 최덕홍 주교는 교구 소속 부제들(이갑수, 제찬규)에게 사제서품을 예정하고 타 교구 부제들도 교구장 허가를 받아 함께 사제품을 주기로 했다. 나와 백응복(춘천교구), 유봉운, 신균식(이상 대전교구) 4명이 합류해 신품 받을 피정에 들어갔다. 그러나 피정 마지막까지 춘천교구장 서리 오(Hayward) 신부로부터 서품허가서가 오지 않았다.
그 해 가을 노기남 주교가 주례하는 서울교구 서품식 때 신품을 받기로 했다. 서품피정을 하고 있는데 오 신부가 와서 구두로 인사발령을 냈다.
평강, 이천 두 본당의 보좌로 가라는 것이었다. 당시 평강과 이천은 이북 공산치하에 있던 지역이고 두 지역간 거리도 100리나 떨어져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인사였다. 당시 전세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이 다시 함락될 위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던 1950년 11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 난리통에 고향을 떠나 타 교구에서 사제품을 받아서 인지 어느 누구도 따뜻하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없었다. 오후에 갈 곳이 없어 서울 돈암동 골롬반회 지부를 찾았다. 마침 평강, 이천 본당의 주임 원 신부(아일랜드 사람)가 있길래 보좌로서 또 새신부로서 인사를 했더니 앉은 자리에서 한번 쳐다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외국인이라 해도 파란만장한 끝에 새신부가 되었고, 또 명색이 보좌신부인데 서품식이 끝나고 인사를 하는데도 반갑다거나 축하한다며 악수라도 청할 수 있을텐데 개 닭쳐다보듯 하고 말았다. 상식도 없고 예의도 없고 몰인정했던 당시의 기억과 인상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나와 백신부 그리고 조응환 신부 이렇게 3명이 골롬반회 지부에 머물게 됐다. 그외 약 10명의 골롬반회 신부가 살고 있었고 미군 종군신부들도 수없이 들락거려 마치 미군 장교 집합소 같았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이야기했다. 영어를 모르는 탓도 있었겠지만 밥만 먹고 나오는 상황이었다. 개밥의 도토리 같은 신세로 가난하고 힘없는 자의 서러움을 뼈저리게 느껴야만 했다.
전세는 날로 불리해지고 있었다. 서울 시민들은 예외없이 보따리를 꾸려 남으로 남으로 다시 피난길에 올랐다. 12월 10일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식당에 가보니 아무도 없었다.
전날 저녁까지만해도 시끌벅적하던(영어로만) 곳이다. 식탁에는 접시 하나 없고 창문에 쳐졌던 커튼마저도 없어졌다. 어리둥절해 있는 우리들 앞에 오 신부가 나타났다. 미사 가방과 미사주 6병을 주면서 나는 이북 평강으로, 백 신부와 조 신부는 춘천으로 각각 떠나라고 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조처였다. 남들은 다 남쪽으로 피난 가는데, 나보고는 북쪽으로 가 죽으라는 말인가?
골롬반회 신부들은 다 어디갔느냐고 물었다. 어젯밤에 모두 일본으로 피난갔다고 말했다. 한국인 신부는 얼마든지 숨어 살 수 있지만 자기들은 숨을 수가 없어 일본으로 간다는 얘기였다. 갓 신부가 되어 죽으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젊은 사람만 보면 막 잡아 전쟁터로 보내던 시절이라 북으로 갈 수도 없었다. 최전선까지 차로 태워주면 그 다음부터는 우리가 알아서 가겠다고 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다며 막무가내로 가라고만 했다. 더 이상 이야기가 통하지 않았다. 당장 수중에 돈 한푼없으니 생활비라도 좀 있어야 하겠다고 말하니 미사 30대분 예물이라며 미화 30달러씩을 주었다. 비정한 심정으로 계단을 내려오는데 한 아일랜드인 신부가 『한국사람이 한국사람 위해 죽기 싫어요?』하며 비아냥거렸다. 속에서 욕이 나왔지만 참아야 했다.
대문을 나섰다. 발길을 어디로 잡아야 할지 망설여졌다. 순간 어른이신 노 대주교님을 찾아뵙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명동으로 갔다. 노 대주교는 『오 신부의 처사가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책임질테니 남쪽으로 피난가라』고 말했다. 어른의 말씀에 위안과 용기를 얻어 피난길에 올랐다. 1952년 3월 부산에서 오 신부를 만났다. 오 신부는 나를 보자 자기가 시킨대로 하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아주 냉랭하게 대했다.
오 신부의 명에 따라 청주에 가서 춘천교구 신자 피난민들에게 2~3일 성사를 주고, 용소막성당에서 50명 가까운 장질부사 환자들에게도 성사를 줬다. 일주일동안 성당 종각 밑에서 먹고 자며 혹사를 하고 나서 구사일생으로 부산에 돌아왔지만 한 달을 앓아야 했다. 육군병원 군의관에게 진찰을 받으니 폐가 나쁘다면서 일년간 휴양하라고 했다.
오 신부는 그것도 모르고 다시 용소막성당으로 가라고 했다. 진찰결과를 말하니 한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메리놀병원에 가서 미국인 수녀에게 재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내가 불신당하는 것도 그렇지만 우리 육군병원이 불신당하는 것에 참을 수가 없었다. 재검을 거부했다. 오 신부는 불순명죄로 성무를 정지한다고 말했다. 끝까지 버티려다 불신을 씻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다는 생각에 재검을 받았다. 그제서야 오 신부는 휴양을 인정했다.
1953년 1월 다시 용소막 주임으로 가 폐허가 된 신자들의 집을 복구하며 사목했다. 10월경 춘천에서 연락오기를, 한국인 신부들은 풍수원에 모여 연례피정을 하라고 했다. 풍수원에 가려면 횡성을 거쳐야 했다. 대화 영월 원주에 있는 신부들이 횡성에 모였다. 하지만 차편이 없었다. 우리는 풍수원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횡성에서 열심히 피정하고 헤어졌다. 결국 오 신부는 불순종했다며 생활비(미사예물 월 30달러)를 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교구장 서리 오 신부와는 사제서품 때부터 계속 갈등을 이어오게 됐다.
결국 1954년 3월 피정사건으로 단죄 받은 나와 박양운, 백응복, 이중현, 양대석 신부는 오 신부와 담판을 가졌고, 오 신부는 우리에게 각자 마음대로 타 교구로 가라고 했다. 대구 최덕홍 주교에게 이 사연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최 주교는 『됐어, 오늘부터 이 신부를 대구교구로 입적시키겠어』하고 말했다. 이후 백응복 이중현 신부도 대구교구로 전적하고, 박양운 신부는 서울교구로 갔으며, 양대석 신부는 후에 원주교구 사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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