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교구에서의 사제생활은 부산 중앙본당 보좌로 시작했다. 서정길 신부(나중에 대주교가 됨)가 계산 주교좌 본당 주임으로 있다가 부산감목대리로 발령이 나면서 나는 다시 계산 보좌로 가야했다.
그 때가 1954년 7월이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이철희 신부가 주임서리였고 나는 제2 보좌였다. 효성초등학교 교장과 효성유치원 원장을 겸임해 아침 조회 때는 훈화도 해야했다.
당시 기억에 남는 것은 지금 사무실 교리실 강당 등이 들어서있는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일이다. 당시 500만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하기 위해 매일 신자집을 방문하며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어야 했고 주일 강론도 돈 이야기가 많았다. 한번은 강론 중에 전기 스파크가 일어나며 마이크를 쓸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사과 궤짝을 성당 한 가운데 놓고 올라서서 큰 소리로 모금한 적도 있었다.
또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식복사의 차별대우다. 나는 식복사도 없었다. 이철희 신부의 식복사는 나에게 하루 세끼 밥만 차려줬다. 다 같은 신부인데도 나는 빨래며 청소를 직접해야 했다. 큰 빨래는 할 수없이 세탁소에 맡겼다. 요즘같으면 어림없는 소리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내가 부임하고 한 1년쯤 있다 이철희 신부는 삼덕본당 주임으로 발령이 났고 계산본당 주임으로는 최재선 신부(후에 부산교구장이 됨)가 부임했다. 당시 최재선 신부는 아주 검소했지만 한편으로는 보수적이어서 나와 마찰이 좀 있었다.
내가 1년 먼저 부임해 있었기에 처음에는 『하던대로 해』 하더니 차츰 못마땅한 것이 쌓였나보다. 특히 남녀문제에 민감했다. 성가대 고등학생 남녀가 같이 앉아서 연습하는 것을 보고는 『성가대 때려치우고 해체 해. 어린아이들로 하면 안되나』하며 못마땅해했다.
드디어 성탄을 앞두고 일이 터졌다. 성극을 준비하던 대학생들이 밥 해먹을 곳이 마땅찮아 나에게 허락받고 사제관 식당을 이용하기로 했다. 나는 최 신부에게 미리 이야기 하는 것을 잊어먹고 판공성사를 주기위해 고해소에 들어갔고, 점심 때가 되자 여대생들은 사제관 식당에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식당에 들어선 최 신부는 『이 뭐꼬! 어디 사제관에 여자가 들락거리노』하면서 몽둥이를 들고 밥솥이며 국냄비를 다 뒤집어 버린 것이다.
나는 고해소에서 나와 자초지종을 듣고 주임신부에게 사과를 청했다. 그래도 화가 안풀렸던지 최 신부는 밤에 용서를 청하러 온 남학생 회장을 흠씬 두들겨 줬다. 성직자로서 흐트러짐없이 사시는 분이지만 그 때는 너무 보수적이어서 힘든 면이 많았다.
보좌시절 나는 강론을 꼭 써서 했고 준비한만큼 『좋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2년치 원고를 펼쳐놓고 비교를 해보니 같은 시기의 강론 내용이 똑같았다. 같이 쓸려고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 내 밑천이 이게 다구나』하는 자각을 하게됐다. 「죽을 때까지 신부 노릇을 해야하는데 2년 지나니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어디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하나」하는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시절이 시절이니만큼 책도 없었다. 어쩌다 일본책이 나오긴 했지만 귀했다. 다시 신학교엘 갈 수도 없고…. 고민을 하다 유학을 결심하게 됐다. 서양말을 배워 항상 좋은 책을 가까이 하면서 에너지를 보충하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학문을 하고싶은 것이 아니라 신부생활(강론)을 잘하기 위해 결심한 유학이었다.
막상 유학을 가려니 경비가 문제였다. 내가 가진 돈이 있을리 만무하고, 교구에서도 공부시킬 형편이 못되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던 동기 이영식 신부에게 편지를 썼다. 공부를 좀 해야겠는데 장학금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정하권 신부(현 마산교구 몬시뇰)와 함께 가고 싶다고 썼다. 1956년 6월 서울 성신고교(소신학교) 교사로 부임하고 얼마 안있어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잠시 선진 유럽에 가서 말만 배워 온다는 것이 12년이나 걸릴줄은 생각도 못했다.
장학금은 「교황청 전교사도회」에서 나왔다. 스위스 프리부르그대학 신학부와 파리 가톨릭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했다. 처음에는 「사목신학」을 전공했다. 파리에 도착하자 교황청 전교사도회에서 『무엇을 전공하고 어떤 학위를 딸 생각이냐』고 물어왔다. 말이나 배워서 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나는 당황했다. 할 수 없이 교회법을 공부하겠다고 하니 『그러면 로마로 가라』라고 말해 사목신학으로 바꾼 것이었다. 정하권 신부는 「기초신학」 분야를 준비했다.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고생이 많았다. 라틴말 강의만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나마도 교수마다 불어식 라틴말, 영어식 라틴말, 독일어식 라틴말, 스페인어식 라틴말 등이 뒤섞여 알아듣기 힘들었다. 생활용어는 프랑스말이었다. 기초어학 준비도 없이 나이 40이 넘어 언어를 배운다는 것이 그렇게 힘들줄이야….
더구나 신학생 신분이면 같은 또래들끼리 어울리며 빨리 말을 배울 수 있을텐데, 신부가 되어서 가니 사람들과 어울릴 수가 없었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교구 지원 한 푼없어 생활비와 잡비를 마련해야 했다. 미사예물 등으로 근근히 이어갈수 있었다.
장학금 수혜기간 4년이 지나자 「왜 너희 나라에 안가나? 여기가 살기 좋으니까 눌러 살려고 하느냐 」는 오해도 샀다. 화가나 『너희가 한국에 가서 처음부터 말 배우며 공부한다면 4년만에 학위를 따겠냐』고 따졌다. 그 후로는 치사해서 장학금을 받기가 싫었다. 수녀원이며 양로원 등을 전전하며 미사를 드려주고, 그 미사예물을 모아 학비며 생활비로 충당했다.
나중에는 「가정사목」을 공부했다. 산아제한이 핵심적인 내용이었는데 당시에는 상당히 완화된 분위기였다. 그러나 회칙 「인간생명」이 나오면서 「절대 불가」론이 대두되고 지도교수는 사표를 냈으며 나의 논문 준비도 중단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나의 가정사목에 대한 관심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대구대교구가 결혼을 앞둔 미혼 남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가나강좌」에 20년 넘게 강의를 해왔으며, 「혼인교리문답」이란 책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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