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나 배워 오겠다는 유학길이었다. 책이 귀하던 시절, 외국책이라도 구해 읽으며 강론이나 잘해야겠다는 마음으로 훌쩍 떠난 것이 12년이나 걸렸다.
1969년 8월 5일부로 교구 상서국장(사무국장)으로 발령나 귀국했으니 햇수로는 「13년만의 귀향」이었다. 대구역에 도착하니 전석재 신부, 장병보 신부, 신상조 신부 등 반가운 얼굴들이 마중을 나왔다. 애석하게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됐지만….
일행과 함께 교구청으로 향했다. 당시 교구청 건물은 2층까지만 완성되고 3층은 골조만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박창수 신부가 당가(재정담당) 신부로 혼자서 교구청을 지키고 있었다.
당시 서정길 대주교는 건강이 좋지않아 동명 성가양로원에서 생활하셨고, 보좌주교는 아직 없을 때 였다. 내가 갔으니 박신부와 나, 두 사람이 교구청을 지켜야 했다. 어쨌든 나는 교구청에 도착하자마자 우선 성직자 묘지를 찾았다. 선종하신 어른들과 선배 동료 신부들을 찾아보고 인사 드림이 마땅하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러나 성직자 묘지를 찾은 나는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말이 묘지이지 쑥대밭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이지 호랑이가 새끼를 칠 정도였다. 겨우 비석만 보이고 봉분이 어디인지 구분이 안되었다. 그나마 최덕홍 주교의 묘는 장마에 휩쓸렸던지 반은 무너지고 없었다. 묘지문은 닫아 걸어놓고 있었으며 참배객이 있을리 만무했다.
놀란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조용히 기도하며 생각했다. 「야!, 이래서야 축복 받겠나. 교구의 어른이신 주교와 신부가 묻힌 곳인데, 이렇게 방치해서야 무슨 복이 내리겠나…」. 아무튼 그 때의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생생하게 남아있을 것 같다.
그해 가을 사제총회 때 안건에 올렸다. 『묘지가 이렇다. 신자들도 부모 형제의 묘는 이렇게 버려두지 않는다. 신부님들은 돌아가신 선배나 동료 사제들을 위해 기도하느냐? 위령성월이면 신자들에게 죽은 이(조상)를 위해 기도하고 묘지를 돌보라고 말하지만 우리(신부)는 뭐하나? 어떻게 손을 봐야되지 않겠느냐』고 하소연 했다. 그러자 반론이 쏟아졌다.
『손 댈려면 돈 들어간다』 『수리 보수할 것 없다』 『일반 신자 묘지로 이장하자』 『 물구덩이라 쓸 수 없다』 『나는 (성직자 묘지에) 묻히기 싫다』 『폐쇄하자』 『…』
생각지 못한 강한 반대에 부닥쳤다. 물론 당시 사제단이 성직자 묘지에 관심과 애정이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반대하고 나설 줄은 몰랐다. 이유가 있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경상도 땅이 대부분 그렇듯 성직자 묘지도 층석으로 이뤄졌던 것이다.
지표의 흙을 조금만 파들어가면 암반이 나오는데 구들장같은 바위가 층층이 쌓여있는 것이었다. 이 놈이 땅속에 묻혀있을 때는 무척 강해 쇳소리가 날 정도다.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구덩이를 팔 때 징으로 깨 드러내야 했다. 그러나 일단 햇볕을 보게되면 푸석 푸석해져 부서지는 성질도 있다.
아무튼 초상이 나면 고생해서 구덩이를 파야되고, 다음날 관을 묻으려고 보면 비도 오지 않았는데 물이 가득 고여있는 것이다. 층석이라 바위틈에 고여있던 빗물이 모인 것이다. 이 물을 다 퍼내고 관을 묻어야 하는데, 그 때뿐 조금 지나면 물이 다시 고이곤 했던 것이다.
관을 넣고 흙으로 덮은들 시간이 지나면 관이 물 속에 잠기리라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처지였다. 이런 상황을 장례 때마다 목격해온 신부들이 쌍수를 들고 반대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도 할말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해보자는 내 의견에 11월 마지막 주일에 각 본당별로 선종한 역대 본당신부를 위해 기도하고, 성직자 묘지 정화 보수 특별헌금을 걷기로 했다. 서정길 대주교의 사인을 받아 공문까지 보냈지만 잘 실천이 되지 않아 2년쯤 하다 그만뒀다.
하지만 묘지를 살려내야 한다는 혼자만의 걱정은 계속됐다. 유럽생활 12년동안 성당 주변에 공원같이 꾸며논 교회 묘지에 친숙해 있었고, 신자들이 들락거리며 기도하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보였던 터라 미련을 버릴 수가 없었다.
더구나 생활 주변의 교회묘지는 사후와 현세가 공존하는 신앙적 표현이 아닌가! 또한 한번 폐쇄하면 다시는 복구하지 못할 것 같았다. 도심에 공동묘지를 만든다는데 누가 허가를 내 줄 것인가? 없애서는 안될 것 같았다.
한번 파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종군 신부에게 부탁을 해 군부대의 도움을 얻기로 했다. 불도저로 파내면 쉬울 것 같았다. 불러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도와주는 것은 문제가 안되는데 작업이 힘들다고 했다. 기존의 묘와 담을 그대로 두고 불도저 작업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산본당 주임이었던 신현옥 신부와 상의했다. 신 신부는 『인력으로 해보자』고 했다. 인부를 사서 한쪽 구석부터 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자꾸 하다보니 요령이 생겼다.
나중에는 지렛대를 이용해 결따라 떼어내기 시작했다. 넉자반(약 136㎝)이나 들어냈다. 기존의 묘는 손댈 수 없으므로 그대로 두고 묘와 묘 사이는 다 파냈다. 파다보니 정말 벌써 썩고 없어져야할 관이 물에 팅팅 불어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트럭으로 흙을 사다 채워넣었다. 그리고 담 주변으로는 큰 골을 내 물이 빠져 나가도록했다.
그 때 이후로 물 고인다는 말은 없었다. 신부들의 반대 의견도 쑥 들어갔다. 잔디를 깔고 나무를 심었다. 흙으로 덮여있던 봉분을 돌로 덮고 사진도 붙이기 시작했다.
그 후 교구청 근무 8년동안 틈만나면 묘지를 찾아 돌봤다. 살다시피한 것이다. 지금은 신자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됐다. 신부들도 성직자 묘지에 관심 갖고 선후배 동료 사제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으면 좋겠다. 내가 죽은 다음, 신부가 신부를 위해 얼마나 기도하겠나 하는 우려가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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