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곳곳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스며 나와야지요. 이 세상과 인간에 대한 사랑,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야 해요. 우리는 독자들을 참된 신앙인으로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바로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는 것이지요』
교회를 위해 한평생을 바친 윤광선(비오.87세.영남교회사 연구소 명예소장)씨. 본사 초대 편집국장을 지낸 그가 생전에 후배 기자들에게 하느님의 증거자가 되라며 늘 당부하곤 했던 말이다.
일제 때 휴간됐던 현 가톨릭신문의 전신인 천주교 회보가 49년 4월 1일 복간되면서 윤씨는 62년까지 13년간 편집국장을 맡으며 신문 제작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왔다.
1927년 천주교 회보 창간 발기인으로 참가했던 아버지 윤창두(요셉)옹의 뒤를 이은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 중에 가톨릭신문은 현격한 발전을 이뤘는데 타블로이드판에서 현재의 신문판으로 판형이 확대됐으며 격주로 발행되던 신문이 주간신문으로 완전히 정착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윤씨는 미사 복사뿐만 아니라 대구 남산본당 달치시오 소년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을 싹터왔다. 소신학교에 입학해 신부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초등학교 6학년 때 중병으로 대수술을 3번이나 받아야 했던 그였기에 어쩔 수 없이 진로를 변경 양복점 견습공으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청년이 된 그는 일제의 갖은 탄압 속에서도 청년회 활성화를 위해 계산 주교좌성당에 성가대를 조직, 창설 맴버로서 활동했고 대구 감천리 교회 묘소에 안장된 허인백, 김종륜, 이양 등 3위 순교자묘소의 이장과 순교묘비 건립을 위해 봉사하는 등 교회의 일이라면 다른 일을 제쳐놓고서라도 늘 앞장서 왔다.
이후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고 사상적인 갈등과 혼란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청년 윤광선은 신앙으로 젊은이의 힘을 모아보자는 뜻으로 부산과 대구를 왕복하기를 몇 차례. 1948년 9월 대구대교구 최초의 가톨릭 청년연합회를 창설한다. 또한 윤씨는 대구대교구에 레지오 마리애를 처음으로 들여와 쁘레시디움, 꾸리아, 꼬미시움 단장을 맡으면서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모범된 신앙 전파를 위해 앞장서 왔다.
그러던 그가 대구대교구의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교회사에 관한 자료수집 및 연구를 해오다 1991년 5월 영남 교회사연구소 초대 연구소장을 역임, 97년에는 대구대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 창설 때 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96년부터 죽음을 앞둔 2002년 7월까지는 대구대교구에서 발간되는 「빛」 잡지에 영남지역의 교회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처럼 윤광선씨는 교회와 하느님 사업을 위해 순교자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수 십년간 한국 교회 역사에 관련된 자료 수집 및 정리 등으로 교회사와 관련된 책에 그의 손때가 묻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64년부터 2년간 가톨릭신문사 사장을 역임한 김수환 추기경은 『초창기 신문 발전에 헌신하신 윤광선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가톨릭신문이 오늘날 이처럼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주교나 사제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에 평신자로서 교회 역사를 바로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열과 성의를 다해온 윤광선씨.
그의 삶은 대구대교구 100년사를 앞두고 있는 이 때 순교자의 후예로서 모범적인 선배의 모습을 보여준 그리스도의 삶이었다.
사진말 - 7월 29일 대구 남산성당에서 교구장 이문희 대주교 주례로 거행된 고 윤광선 선생의 장례미사에서 동생 윤광재 신부가 분향을 하고 있다.
-조사(요약)-
시대의 학문과 행동 일치하는
모범적인 삶 보여준 참 실천가
故 윤광선 비오 선생님은 한 평생을 평신도 사도직 활동에 크게 공헌하신 공로자이시며 아울러 우리 후학들에게 평신도의 모범적인 삶을 보여주신 참 실천가이십니다.
온화한 성품과 성실한 기도생활 그리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교회사 연구와 집필, 그리고 어렵고 가난한 가운데서도 늘 웃으시면서 인내하시는 모습은 참으로 우리들의 훌륭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가끔 부족한 제가 선생님 댁을 방문하면 선생님은 햇빛이 따뜻하게 들어오는 서재에서 열심히 글을 쓰시거나 사료 정리를 하다말고 구부정한 허리를 펴서 저를 돌아보고는 웃으시면서 반갑게 맞아 찬장에서 술을 꺼내어 권하면서 인간적인 삶과 교회 앞날을 걱정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이렇듯 선생님은 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습니다.
부족한 제가 몇 년 전부터 선생님께 우리 교회의 사료를 위해서 회고록을 쓰시도록 권했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은 흔쾌히 대답은 하셨지만 끝내 쓰시지 못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까닭을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마 선생님에게 부탁하는 다른 원고를 불편한 몸으로 어렵게 쓰시다보니 정작 당신의 귀중한 회고록을 쓰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렇듯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의 조그마한 청이라도 거절하지 못하시고 성의껏 도와주던 인정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삶은 이 시대의 학문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정한 실천적인 가난한 선비의 삶이었습니다. 또한 자기의 무거운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열심히 예수님 뒤를 쫓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하느님께서는 귀한 천상의 상급을 내리실 것이며, 선생님의 눈에서 위로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부디 선생님께서 하느님을 모시고 영광 전에서 편안히 계시면서 후손들뿐 아니라 교회와 특히 교구 평신도 사도직의 발전을 위해서 귀한 전달자가 되어 주십시오. 마지막으로 불초 우리 후학들은 선생님께서 그토록 남기고 싶어하셨던 선생님의 귀중한 글들을 모아서 유고집을 만들어 봉정하겠습니다.
마백락(끌레멘스.영남교회사 연구소 부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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