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있어 가장 보람있는 일 중의 하나는 「한국교회 사목문서 통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하느님 대전에 나아갔을 때 『지상에서 뭐했냐?』고 물으신다면 『이런 것 좀 했습니다』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유럽에서 12년 가까이 공부하다 교구 사무국장의 소임을 받고 1969년 귀국해 교구청에 출근을 해보니 문서정리가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이때까지만해도 사목문서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 어느 것 하나 통일된 양식이 없었던 것이다. 교적이나 성사 문서는 신자관리에 있어 절대적이며 중추적인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본당마다 교구마다 다 양식이 달랐다.
더구나 문서를 보존해야 된다는 의식마저 희박하고 보존 시스템마저 없어 혼인문서는 낱장으로 돌아다녔고 조금 지난 것은 아예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누구 하나 문서와 관련해 책임지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사람이 바뀌면 문서를 태워 없애기까지 했다. 유스티노 신학교 출신 서품대장도 없어져 나중에 내가 소급해서 만들었던 기억이 난다.
대구만 통일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에 전국 교구를 왔다갔다하며 뜻을 모았다. 그러나 모두들 필요성은 공감하면서 선뜻 나서는 이는 없었다. 혼자서 자를 대고 선을 그으면서 하나 하나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우선 성사문서부터 통일시켜나가던 차에 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었고 진도는 느려졌다. 1981년 이후 다시 대구로 내려와 교구 일을 보면서 2차 통일 작업에 돌입, 모든 양식을 재구성했다.
총대리회의와 주교회의를 거쳐 90년부터 통일된 사목문서를 전국에 보급했다. 「한국천주교사목지침서 해설」 699쪽부터 811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아무도 관심갖지 않고 분담할 사람도,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도 없이 20년에 걸쳐 혼자서 다 하다시피 해온 일이었다. 힘들었지만 참 보람있는 일이었다.
교구 사무국장으로 재임하다 1972년 10월 13일 삼덕본당 주임으로 발령 받았다. 이문희 보좌주교의 11월 30일 성성을 앞두고 였다. 그후 1년쯤 지나 당시 주교회의 의장이었던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느닷없이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김남수 신부(후에 수원교구장이 됨)의 임기가 만료되고 후임자를 물색 중인데 『적임자가 자네 뿐이야』라며 유혹(?)했다.
출판사업 수익으로 중앙협의회를 꾸려가고 주교회의도 뒷바라지해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니 못하니 실강이도 벌였지만, 친구같이 지내던 김추기경의 부탁을 뿌리칠수 없었다. 그렇게 시작한 중앙협의회 생활이 2.3.4대 사무총장을 연임하면서 8년이나 걸렸다.
사무총장의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문서와의 씨름은 계속됐다. 중앙협의회나 주교회의나 문서정리가 안된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예 다 치워버리고 깨끗했다.
그래도 남은 것은 정리해서 제본하고, 전국적인 문서 통일 작업을 조금씩 조금씩 해나갔다. 주일도 없이, 밤 12시 이전에 자본적도 없이 일했지만 사무총장의 직무가 너무 바빠 진도는 느렸다. 그 때 무리한게 병(오십견)이 돼 지금도 병원엘 계속 다니고 있다.
사무총장으로서 가장 노력을 기울인 일 중의 하나는 「개방적인 주교회의」를 만드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공부할 때 프랑스 주교회의를 가까이서 볼수 있었고, 한국 주교회의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국 주교회의가 주교들만 모여 비밀회의를 갖고 그 결과만 발표함으로써 전체 교회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사무총장 재임시 규약들을 조금씩 개정하면서 전문위원을 대동시키고, 옵저버 제도 도입을 통해 누구든 참여할 수 있게 하는 등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대상황의 혼란과 주교들의 무관심 등으로 큰 진전을 보지 못했다. 지금도 큰 변화가 없어 아쉬울 뿐이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역시 정치문제였다. 유신치하라는 시대적 상황이 낳은 산물이겠지만 주교회의조차 반정부, 친정부 성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속으로는 극단으로 갈라져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시국문제와 관련한 주교회의의 회의 분위기는 살벌했다. 어떤 사건이 터지면 『성명서를 발표하고, (기도회 등) 행사를 갖자』와 『그럴 필요없다』는 입장이 확연히 갈렸다.
회의를 준비하고 실무를 책임지는 나로서는 입장이 여간 곤란하지가 않았다.
당시 시국을 보는 내 입장은 이러했다. 교회가 정치문제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신앙적이고 윤리 도덕적인 면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인권 억압은 당연히 교회가 관여할 일이었다.
그러나 방법이 문제였다. 툭하면 「기도회」가 열렸는데 「기도회=미사=데모」라는 인식이 깔려있었다. 모여서 하느님께 기도하고, 호소하고, 토론하는 기도회가 아니라 시작부터 끝까지 악의에 찬 저주를 퍼붓는 기도회요, 데모를 시작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기도회에서는 흥분과 살기가 넘쳐났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는 섬짓하기까지 했다.
사랑과 평화는 간곳 없고 정의와 인권만 외쳤으며, 정권을 타도해야만 정의가 바로선다고 믿었다. 교회답지 못한 모습이었다. 기도와 미사를 드리고, 성명서를 낭독하고, 침묵시위 등으로 평화롭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교회가 취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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