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산업연수생제도
『이젠 한국말도 많이 늘고, 일도 제법 손에 익어 가는데 무조건 떠나라니…. 지금껏 키워왔던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최근 「노동허가제」를 주장하며 서울 명동성당에서 농성에 들어간 이주노동자 캠프에 새롭게 합류한 파키스탄인 아지즈(가명.29)씨는 한국말로 또박또박 자신의 심정을 밝힌다.
3년 전 고국인 파키스탄에 있을 때만 해도 「불법」이라는 말과는 담을 쌓고 살아왔다는 그는 요즘 「불법체류노동자」라는 한국 정부가 달아준 꼬리표를 달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뜨거운 명동거리에서 오가는 한국인들에게 자신들의 처지를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언제 강제출국 당할 지 모르는 가운데 늘 불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정부가 최근 외국인 산업연수생을 늘리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면서 아지즈씨와 같이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고통과 절망의 그림자가 짙어가고 있다. 합법적인 산업연수생 정원을 현재의 12만6750명에서 14만5500명으로 늘리는 대신 올 초 자진신고한 불법체류노동자 25만6000여명을 내년 3월까지 모두 내보내겠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외국인력제도 개선방안」이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논란에 새로운 불을 지피고 있는 것이다.
이 논란의 중심에는 「산업연수생제도」가 놓여 있다. 정부가 발표한 대책에는 노동.인권단체는 물론 노동부까지 나서 추진해온 「고용허가제」는 그림자도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숱한 인권 시비를 불러 일으켜온 「산업연수생제도」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비판만 일고있다. 앞으로 더욱 「확대재생산」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인권문제를 두고 교회 안팎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교회의 꾸준한 노력
교회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사목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외국인력 산업기술 연수」가 시행된 후 이를 둘러싼 논란이 사회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한 92년부터다. 92년 8월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외국인노동자상담실을 필두로 93년에만 안양 전진상복지관 이주노동자의 집, 인천교구 외국인노동자상담소 등 3개의 기관이 새로 생겨나는 등 이주노동자 사목이 본격화됐다. 이후 매년 한두개의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생겨 현재는 전국적으로 10여개의 시설이 이주노동자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전해주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교회는 음식나누기.생계비 지원 등 생활에 기반이 되는 물적인 지원을 비롯해 신앙상담 등 각종 상담, 의료 지원, 쉼터 제공, 법률 지원 등 다양한 노력을 펼쳐왔다. 이같이 교회의 활동은 지역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주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다양한 형태로 진행돼왔다. 도움을 청할 곳조차 몰라 절망 속에 신음하던 이주노동자들에게 다가간 교회의 손길은 희망 이상의 의미로 다가가기도 했다. 특히 IMF 이후 본격화된 경제난으로 이중 삼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던 이주노동자들에게 다가선 교회의 모습은 그 자체로 교회의 위상을 새롭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교회의 노력들이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수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급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어왔다. 이에 대해 관계자들은 단체간의 원활한 네트워크를 통해 충분히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음에도 그런 노력들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데서 그 원인을 찾고 있다.
안양 전진상복지관 이금연 관장은 『교회가 운영하는 이주노동자 시설이 양과 질적인 면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효과면에서는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고 밝히고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목이 전교회적 관심 속에서 이뤄질 때 올바른 대안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일선의 이같은 문제의식에도 불구하고 교회 전체 차원의 대안 마련에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이주노동자 문제를 둘러싸고 사목자들간에 다양한 시각의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안의 광범위함과 성격에 비춰볼 때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부재한 현 상황은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우리 인식의 한계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소규모이지만 지난해 3월 안양 전진상복지관을 비롯한 구미와 부산지역 이주노동자 지원단체들이 「이주.여성인권연대」를 결성해 이주노동자를 둘러싼 전교회 차원의 사목 대안 마련에 나서 새로운 전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주.여성인권연대」는 출범 후 「해외투자기업 외국인산업연수생 인권백서」를 만드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냄으로써 전국적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한층 더해주고 있다.
부산교구 외국인노동자상담소 김광돈 실장은 『다양한 시각의 차이를 넘어 최소한의 공감대를 이뤄내는 게 급선무』라며 『교회가 앞장서 문제의 본질을 명확히 하고 사목 대안 모색에 적극 나설 때 신자들이 이주노동자에 대한 올바른 시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교회 이주노동자 지원 시설
●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 외국인노동자상담실 02-924-2706
● 안양 전진상복지관 이주 노동자의 집 031-443-2876
● 인천교구 외국인노동상담소 032-765-1094
● 대구 가톨릭근로자회관 053-253-1313
● 부산교구 직장노동사목 외국인노동자상담소 051-469-6408
● 수원교구 이주노동상담소 엠마우스 031-257-8501
● 구미 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외국인노동자상담소 054-452-2314
● 라파엘클리닉(외국인노동자진료소) 02-763-7595
● 안산 외국인노동자사목센터 갈릴래아(말씀의 선교수도회) 031-494-8411
● 서울대교구 의정부 이주노동자상담소(의정부 녹양동본당) 031-878-6926
● 용인 CLC 이주노동자인권센터 031-339-9133
■ 네팔인 남편 한국인 아내 가정 모임 네코(Ne-Co)
“쫓겨다니지 않고 살고싶어”
혼인신고 할수없어 법적인 혜택 못받아
마음높고 나다닐수도 없어 밤에만 활동
『1년에 한두번 있을까말까 한 가족나들이마저 늘 불안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셈이지요』
네팔인 남성 이주노동자와 한국 여성이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들의 자조모임인 「네코(Ne-Co:Nepal-Corea)」를 이끌고 있는 이경주(36) 회장은 지난 삶을 묻는 물음에 허탈한 웃음부터 보인다.
91년 한국에 온 동갑내기 남편 비노드(Binod)씨를 만나 사랑을 싹 틔울 때부터 이회장의 삶은 무슨 죽을죄나 지은 사람의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마음놓고 같이 거리를 거닐 수도 없어 주로 밤에만 나다녔던 가슴 답답함, 정부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오그라드는 가슴, 가족과 친구들에게 늘 미안하기만 했던 기억 등은 적지 않은 세월과 싸우고서야 가슴 한켠에 개켜둘 수 있었다.
지난 2000년 6월 네코가 발족할 당시부터 함께 해오다 지난해부터 회장직을 맡아 국제결혼가족들의 삶에 누구보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회장은 이제 갓 2살을 넘긴 아들 용운이가 자랄수록 새로운 고민을 쌓아가고 있다.
현재 네코 모임에는 이회장과 비슷한 처지의 부부 30여쌍이 함께 활동하고 있다. 매월 마지막주 일요일이면 인천과 수원은 물론이고 충남 서산, 부산 등지에서 10쌍 안팎의 부부들이 안양 전진상복지관에서 모임을 갖고 자신들이 겪고 있는 문제들을 나누고 함께 해결방안을 찾는다. 이들의 한결같은 꿈은 「쫓겨다니지 않는 삶」이라는 소박하기까지 한 모습이다.
남편이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이 나설 입장이 못돼 여성들이 맞벌이에다 집안일까지 떠맡아야 할 처지여서 이들은 자연 삶에 지칠 수밖에 없다. 그런 서로를 토닥여가며 새로운 희망을 일궈 나가는 것이 바로 「네코」가 해내고 있는 몫이다.
다른 국제결혼가정들처럼 대부분이 혼인신고도 못하고 살아야 하기에 법적인 혜택은 고사하고 미혼모라는 따가운 눈총 아래서 여성들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2세들 문제다. 경제적 불안정으로 네팔의 조부모들에게 맡겨지는 사례도 적지 않아 원치 않는 이산가족으로 지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저희들은 나은 편입니다. 일반인들의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상상치 못할 아픔 속에 신음하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네코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안양 전진상복지관 이금연 관장은 『이주노동자도 불가침의 인권을 지닌 인간이란 점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며 『「교회 안에 외국인은 없으며, 하느님 가족의 성인들과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동료 시민들이 있을 뿐(요한 바오로 2세, 이주민들의 대희년 미사 강론)」이라는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