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더위를 피해 길을 떠날 때 나는 우선 두려움이 앞선다.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의 행렬, 빽빽한 사람의 숲, 몇 시간씩 무더위 속에서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시간.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차라리 길 떠나기를 멈추어 버리는 때가 더 많다. 더위를 피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더위를 찾아 떠나는 피곤한 여행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딘가로 떠나야 하면 나는 이름난 해수욕장이나 많이 알려진 곳을 피해 길을 잡는다. 전라북도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하섬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그런데 그때가 7월 중하순이라면 가는 길에 전주를 향해 잠시 방향을 튼다. 기운을 내기 위해 점심은 전주쯤에서 먹는 게 좋을 듯 싶다. 인터체인지에서 시내로 십분 남짓 들어오다가 덕진공원 근처에 차를 세우고 전국에서 청결한 식당 10대 업소에 꼽힌 전통음식점 「고궁」에서 유기그릇에 담겨 나오는 전주 전통비빔밥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얼굴에 화색이 돌 것이다. 소뼈 육수로 밥을 짓고 뜸을 들일 때 콩나물을 넣어서 그런지 황포묵과 육회가 곁들여 져서 그런지 입안에서 그냥 녹는 비빔밥 한 그릇을 비우는 호사스런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나서 덕진공원으로 천천히 걸어가 덕진연못에 가득한 연꽃 구경을 하는 것도 육신의 기쁨에 이은 정신의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시간이 될 것이다.
후백제때 조성되었다는 1만3000평의 연못에 가득 피어 있는 연꽃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연꽃은 6월 하순부터 7월 하순까지 절정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야말로 연꽃의 바다이다. 그 연꽃을 보면서 거진이진(居塵離塵), 재세이세(在世離世)를 생각한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먼지를 떠나 살 수는 없다. 먼지 속에서 먼지와 티끌을 뒤집어 쓰고 산다. 그러면서도 먼지를 떠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다.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의 진흙을 떠나 살 수 있는 길, 그 길을 찾고자 한다.
그 길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면서 나처럼 살면 된다고 말하는 꽃이 연꽃이다. 부처가 제자들에게 다만 말없이 들어서 보여준 꽃, 가섭만이 그 깊은 뜻을 알고 미소로 답한 꽃 그 연꽃이 연못 가득 피어 있다. 물방울이 또르르 진주 알이 되어 구르는 연잎이 벌판처럼 펼쳐져 있다. 하나 꺾어 비 오는 날 우산으로 들고 서 있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연잎의 바다이다.
공원을 나오는 길에 신석정 선생의 시비와 흉상 앞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네 눈망울에서는/ 초록빛 오월/ 하이얀 찔레꽃 내음새가 난다』는 시 「네 눈망울에서는」 한 편을 정성 들여 읽는 일을 빠뜨리면 안 된다.
그리고는 부안과 변산 방향으로 빠져 나온다. 부안은 신석정 선생의 고향이다. 신석정 선생이 26세 때 직접 짓고 「청구원」이라 이름 붙였다는 집에 들러보거나 변산해수욕장 가는 길가 해창공원에 세워져 있는 신석정 시비를 보는 것도 좋지만 신석정 시집 한 권을 챙겨 가지고 갔다가 하섬에 가서 찬찬히 읽어보는 것도 좋으리라.
하섬은 지도에 나오지 않는 섬이다. 변산해수욕장을 그냥 지나쳐 고사포 해수욕장으로 들어간 다음 거기서 배를 얻어 타고 가면 된다. 배로 5분 거리이다. 단 그곳은 원불교 수련원이 있는 곳이므로 사전에 미리 전화를 하고 허락을 얻어야 한다.
그 섬에는 수련원 시설만 있을 뿐 민가는 없다. 무인도라면 무인도가 되겠는데 수련원을 운영하는 정녀님이 계시기 때문에 무인도는 아니다. 그러나 나리꽃, 엉겅퀴꽃, 도라지꽃이 제 빛깔로 진하게 피는 이 섬에서는 살생을 금해 고기를 잡는 일도 낚시를 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등이 붉은 게가 섬 위의 숲길에까지 마음놓고 돌아다닌다.
점점 멀어져 가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고 바위를 때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는 섬. 매미우는 소리, 새소리, 닭 우는 소리만이 시끄러울 뿐 사람소리는 들리지 않는 섬. 신문도 텔레비전도 보고 들을 수 없어서 좋은 섬. 세속을 떠나 몇 날 며칠이고 머물고 싶은 섬. 거진이진(居塵離塵)하고 재세이세(在世離世) 할 수 있는 정토. 하섬에 가고 싶다. 가서 나오지 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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