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년만의 신자 재발견
『저 상이 당신들이 믿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와 같습니다. 당신 하느님이 바로 내 하느님입니다』
1865년 3월 17일,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에 있는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에 세 명의 여인이 찾아와 성모마리아 상을 가리키며 말문을 열었다. 17세기 초부터 시작된 모진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잃지 않고 지켜 온 신자들이 260여년 만에 다시 등장한 순간이었다.
오우라 성당은 1865년 1월 24일 프랑스 파리외방전교회 쁘띠 쨩 신부에 의해 지어졌다. 당시 성당은 바로 옆에 있는 외국인 거주지(Glover Garden)의 외국인들을 위해 봉헌됐지만 이 신자 재발견으로 일본의 잠복 신앙을 발견하게 된 명소로 자리하게 된다. 오우라 성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성당으로 1933년 국보(國寶)로 지정됐다. 가톨릭신자뿐 아니라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이곳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매년 3월 17일 신자발견 축일과 12월 24일 성탄전야 때만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 일본 가장 오래된 목조교회건축물인 오우라성당.
니시자카 언덕을 오른 순교자들
시내 중심가인 나가사키역 건너편으로 난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26성인 순교자 기념비」와 기념성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1597년 2월 5일 일본인 20명과 스페인인 4명 등 26명의 성인(1862년 시성)이 순교한 곳이다. 교토와 오사카 등지에서 체포되어 한 달이 넘게 걸어온 이들은 자신들이 처형될 날이 다가오자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를 메고 오른 골고타 언덕과 꼭 닮은 이곳 니시자카 언덕을 순교의 장소로 택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26명의 성인 외에도 약 600여명 이상의 신자들이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나가사키 시내와 항구가 한눈에 보이는 이곳에는 화강암 대리석에 청동으로 순교자들의 전신을 새긴 기념비가 들어서 있고, 기념비 뒷편으로는 사료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신앙 박해기, 일본에서는 신자를 가려내기 위해 예수의 초상화나 마리아상이 조각된 메달을 발로 밟게 하는 후미에(踏繪)라는 방법이 동원됐다. 신자로서 차마 메달을 밟지 못한 사람은 모두 처형됐다. 후미에가 벽면에 장식되어 있는 전시관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대형 십자가에 못박힌 일본 순교자상이 눈에 들어온다. 사료관에는 후미에 진품을 비롯해 일본에 상주하던 예수회 등 수도회 사제들이 본국으로 보낸 편지, 마카오에서 가져온 성인의 유해, 순교당시 상황을 묘사한 「순교화(畵)」 등이 1, 2층에 걸쳐 전시되어 있다.
26 성인 기념성당은 하늘로 우뚝 솟은 두 개의 첨탑이 특징적이다. 두 첨탑은 각각 성모 마리아와 하느님의 성령을 의미한다. 첨탑에는 또 작은 파편들이 형형색색으로 빛나고 있는데 이것은 1945년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당시의 파괴된 성당과 건축물들이 남긴 것들이다.
▲ 우라카미성당의 원폭당시 파괴된 성모상
원폭이 아닌 평화를
1945년 8월 9일 원자폭탄은 1914년 건립돼 동양제일을 자랑하던 우라카미(浦上) 성당 500m 상공에서 폭발했다. 당시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던 사제 2명과 신자 8500여명은 우라카미 성당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니시자카 언덕에서 버스로 10여분을 가면 원폭으로 폐허가 된 시가지를 복구하며 원폭투하 중심지 언덕에 세워진 원폭중심공원이 있다. 이곳에는 기둥만 남은 우라카미 성당의 잔해와 기념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생생히 느낄 수 있게 한다.
현재의 우라카미 성당은 당시 폭발로 성당의 종(鐘)이 날아간 곳에 새로 지어졌다. 주일이면 8000여명의 신자들이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찾는다는 성당에는 원폭 당시 파괴된 흉물처럼 변한 성모마리아상과 성 요셉상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가톨릭 첫 전래지 ‘히라도’
19세기 중엽의 신자재발견, 17세기 시마바라의 난과 박해기, 16세기 26인 성인의 순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찾은 곳은 일본에 가톨릭이 처음 전래된 나가사키현 히라도(平戶)다. 나가사키에서 버스로 2시간여를 가면 다다르는 이곳은 1550년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가 포교활동을 시작한 곳이다. 히라도에 전파된 천주교는 이후 규슈 일대 일본인들에게 급속히 퍼지게 된다.
히라도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기념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 옆에는 십자가를 치켜 들고 서 있는 사비에르 신부의 동상과 「히라도 순교자 현양비」가 자리하고 있다. 미지의 땅인 일본에서 하느님을 알리는 일을 펼치던 사비에르 신부의 정열과 노력이 동상에서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히라도 크리스찬 자료관에는 후미에와 더불어 일본 가톨릭 신앙의 증거물로 여겨지고 있는 성모 마리아 관음상이 전시되어 있다. 「마리아 관음상」은 불교신자로 가장하기 위해 아이를 안은 뒷면에 금 십자가를 새겨 놓아 당시 잠복 신자들의 맹렬한 신앙 열을 엿볼 수 있게 한다.
▲ 나가사키현 히라도시 정상에 위치하고 있는 성 프란치스코 사비에르 신부 기념성당 앞마당. 사비에르 신부 동상 왼쪽편으로 「히라도순교현양비」가 자리하고 있다.
■ 아마쿠사·나가사키를 다녀와서
성지순례 중 만난 일본 나가사키현 관광연맹 고사카 히로유키씨는 『일본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한국교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교세는 작지만, 나가사키의 경우는 다르다』며 『나가사키는 박해를 이겨낸 신앙심이 후손들에게 아직까지 남아있는 데다 그 신앙을 증거하는 많은 성지들이 있어 세계 어느 곳과도 견줄만하다』고 자찬했다.
사실 성지순례단 일행이 3박4일간 둘러본 일본의 성지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후미에」로 대표되는 박해의 흔적과 가톨릭의 역사를 말없이 증명하는 오래된 성당은 교회 차원이 아닌 지자체 차원에서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나가사키현 어디를 가도 십자가가 서 있는 학교와 성당들이 일행을 반겼다. 신도(神道) 신자가 9200만명, 불교신자는 8000만명인데 반해 개신교와 천주교 신자를 합쳐 89만명뿐인 곳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특히 한국신자들의 감성을 자극한 것은 일본의 가톨릭 교회가 한국과 같이 박해를 받으며 신앙을 지켜왔다는 점이었다.
차마 예수 그리스도와 마리아가 새겨진 메달을 밟지 못하고 순교를 택했던 그들의 이야기는 조선시대 박해를 겪었던 신앙선조들의 모습과 너무도 흡사했다. 또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들이 일본 땅에서 신앙을 얻고 그곳에서 순교한 이야기를 들으며 새삼 과거의 파란만장했던 양국의 역사가 성지에 숨겨져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규슈일대에 널리 퍼져 있는 성지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 그리고 성지의 역사와 유래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일본 교회의 관계자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열도에 숨쉬는 순교자들의 숨은 혼을 보다 많은 신자들이 느껴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 혼도시 크리사찬박물관에서 설명듣는 한국신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