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간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무총장 직무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온 것이 1981년 6월이었다. 그 때는 이미 선목신학교(대신학교) 개교를 위해 문교부에 인가신청서를 제출한 상태였다.
교구에서는 나에게 초대 책임자(학장)로 내정됐으니 개교준비에 만전을 기해달라고 했다. 나는 교구청에 거주하면서 교수진을 짜고, 학교운영을 위한 간부들을 물색하는 한편 직원들도 모집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한편으로는 문교부에 올린 인가신청을 매듭짓기 위해 노력했다. 앞산 아래 있던 선목소신학교를 대신학교로 개보수하는 작업도 지시해야 했다.
가을쯤이었다. 학교를 운영할 사람이 먼저 들어가 살아봐야 되지않겠나 하는 생각에 먼저 입주를 했다. 최병선 신부가 당가(재정담당)를 맡고, 첫해 1학년을 가르칠 교수로 이홍근 신부와 박석희 신부(후에 안동교구장이 됨)가 임용됐다.
이렇게 나를 포함한 네사람이 학생 받아들일 준비를 해나갔다. 그런데 겨울에 접어들 무렵 팔이 마비되면서 쓸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났다. 후에 알았지만 목디스크였다. 이듬해 개교는 했지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비증세는 더욱 심해져 밥숟갈 떠기도 힘들어 왼손으로 식사를 해야했다.
학장이 제대로 일을 못하니 학교도 어수선했다. 헌집을 수리해서 학생만 받아놓은 꼴이었다. 학생도 교수도 처음이라 어떻게 살아야될지 몰랐다. 선배도 없고 전통도 없었기에 보고 배울 것이 없었다. 규율도 지켜지지 않았고 침묵시간도 없었다. 벌망아지같은 학생들을 강제 수용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신부로 잘 키우려면 내가 몸으로 뛰며 가르치고 감시하고 감독해야되는데 몸이 따르지를 않았다. 그래도 책임감 때문에 겨우겨우 다니며 학생들을 타이르고 야단치고 하다보면 밤 11~12시 돼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힘들었다. 의욕도 떨어졌다.
6월 1일 유스티노 축일에 개교기념 행사를 갖고서는 수술받으러 일본 오사카엘 갔다. 당시 국내에서는 목디스크 수술이 불가능했고 마침 일본에 유능한 의사가 있다고 해서 간 것이다. 당연히 학장 직무는 사임을 표하고 갔다.
일본에서 검사하는데 1달이나 걸렸다. 어느날 의사는 『아직 수술할 단계는 아니다』며 좀더 지켜보자고 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쉬고있는데 활법하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비틀고 꺾고 당기고 주무르고 하더니만 「아뿔사!」 더 악화되고 말았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려고 하니 팔이 완전히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감각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정월 초하루라 도움 받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한 손으로 간신히 운전해 병원을 찾았다. 두 달 반이나 입원해야 했다. 교구청에서 대기하며 휴양하고 있었다. 마침 한국천주교회 200주년(1984년)을 앞두고 그 준비가 막 시작단계에 있었다.
1982년 11월 교구 「200주년 기념준비위원회」가 결성되고 내가 위원장의 소임을 맡게 됐다. 사목회 산하에 14개 분과를 두고 업무를 추진, 종합하는 일을 했다. 이전까지 성직자 중심의 교회를 평신도 중심으로 쇄신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200주년이 지나가고 준비위원회도 해체됐다. 84년 8월 대덕본당 주임으로 발령 받아 갔지만 1년반도 지나지 않은 86년 1월 30일 다시 교구청으로 불려들어갔다. 이번에는 교구 사무처장의 직분이 주어졌다. 그 해 7월 9일부터 총대리를 겸하면서 94년 4월까지 8년넘게 교구청에서 생활했다.
지난호에서 언급했듯이 사목문서 통일은 91년도에 1차적으로 마무리하고 그후에는 전국 교세통계표 양식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 동안 주먹구구식으로 기록돼 잘 활용되지도 못하던 통계표를 확 뜯어 고쳤다. 필요없는 영어 표기란도 다 빼버렸다. 총대리회의를 통해 수정 보완하면서 완성된 것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전국 교세통계표 양식이다.
교구에서는 각종 사목문서 사용과 미국식 「혼인봉투」 양식을 도입,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사실 이전까지는 여러 장 되는 혼인 문서가 낱장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돌아다니다 사라지기 일쑤였다. 이것을 한데 모아 한 봉투에 보관하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공문서 발신대장 등 교구 고유 문서양식을 만들어 보급했다. 본당 사목감사를 나가서도 문서정리가 잘됐는지 꼼꼼히 살펴보고 잘못된 것은 수정해주고 가르쳐 줘야했다.
당연히 본당 신부들과 사무장들은 『너무 까다롭다』며 나를 싫어했다. 『신자들 사목하기도 바쁜데 뭘 이렇게 하라는 것(문서 정리)이 많냐』며 투덜대기 여사였다.
하지만 게의치 않았다. 사무장 교육을 강화하고 신부들의 이해를 촉구했으며 사목감사를 엄격히 했다. 나중에는 대구뿐 아니라 광주신학교 부제들을 대상으로 사목문서 교육도 실시했다.
사회가 복잡다단해질수록 사목문서의 중요성은 더 커지는 법이다. 세례받은 사람에게 다시 세례를 주고, 혼인한 사람에게 다시 혼인성사를 베풀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렇게 꾸준히 노력해온 것이 약 15년이었다. 사목문서 기록과 보관 시스템이 이제야 정착되는 것 같아 한편으로 자부심을 느낀다. 이제는 모든 문서들이 전산화되면서 또 한번 양식이 바뀔 것이다. 더욱 발전되길 기대해본다.
이렇게 살다보니 91년도에는 교황청 고위성직자의 명예를 상징하는 몬시뇰에 서임되기도 했다. 94년 4월부터 96년 8월 은퇴하기까지 계산 주교좌 본당을 사목하는 기회도 주어졌다. 고마운 시간이었다. 많지 않은 본당 사목 중 가장 오랫동안 본당에 머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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