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 생활 50년 하고도 2년이 더 흘렀다. 심신이 기진한 나이, 사소한 집밖 출입도 큰 마음을 먹어야 할 만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 동안 숱한 과오와 시행 착오, 허물의 연속이었지만 그래도 큰 실수는 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주님께 감사드리며 생활하고 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행운아」는 아니었다. 고통과 시련, 십자가의 가시밭길에 더 가까웠다. 다행히 위기가 닥칠 때마다 주님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넘기곤 했지만 봉변을 당해 죽을 뻔 한 것이 세 번, 중병으로 몸져 누운 것도 네 번이나 된다.
무엇보다도 내 사제 생활을 굳건하게 지탱해주었던 것은 오직 주님을 따르는 것만이 내 삶의 의미라는 확신이었다. 내 사제로서의 삶에 첫 번 모토는 「주님의 뜻」을 따르는데 있었다. 또 하나의 내 신조는 『항상 기뻐하십시오. 늘 기도하십시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라는 데살로니카 전서 5장 16절의 말씀이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어떤 고통과 어려움이 있다 해도 기쁨과 감사의 기도였던 것이다. 여기에 내 스스로 경계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채찍질이다. 『사제 생활을 아무렇게나 한다면 이보다 더 수월한 생활은 없겠지만 사제로서 철저한 생활을 하려면 이보다 더 어려운 생활도 없다』
나는 1922년 황해도 신계군 고면 화천리에서 출생했다. 우리 집안은 본래 천주교 집안은 아니었다. 유교를 신봉하고 가문의 전통을 무엇보다 소중히 생각하는 지극히 평범한 선비 집안이었다. 그러던 중 진사를 지낸 증조부가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그리스도교의 진리에 대해 전해 듣고는 열심한 신앙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증조부께서는 신부님들과 함께 이곳 저곳의 공소를 찾아다니며 제대를 꾸미기도 했다.
증조부의 열심한 신앙을 바탕으로 우리 집안은 이내 돈독한 믿음을 지닌 교우 집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자연스럽게 집안 어른들은 내게 성직자의 길을 권유하기 시작했고 특별한 갈등이나 고민 없이 동성상업학교(소신학교)를 들어갔다. 특히 고령의 할아버지께서 공소에 오신 중년의 본당 신부님께 큰 절을 하시는 것을 보고 신부님이 진사보다 높은 분으로 생각하고 신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더 들기도 했다.
1942년 3월 당시 교장이었던 신인식 신부님의 주선으로 나는 김수환 추기경, 최석우 신부, 최익철 신부와 함께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됐다. 명치대 예과에 입학해 공부를 하다가 본과 2학년이던 1944년 1월 20일 동포 학생들과 함께 강제로 학도병으로 끌려갔다.
비록 실전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매일 가상의 적을 앞에 두고 칼을 꽂고 찌르는 훈련을 되풀이해야 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택했던 신학생으로서는 참으로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견디다 못한 나는 교관의 눈을 피해 총에 묵주를 감고 훈련에 임하면서 기도로 도움을 청함으로써 위로를 얻고 그 혼돈과 고통의 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다.
최석우 신부와 함께 니이가다껭 「시바다」 부대의 같은 중대에 입대했던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일은 선종완 신부가 준 고해성사였다. 이 지역은 9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눈이 내리는 참으로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땅이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에 이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멀리 동경으로부터 우리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기 위해 찾아온 선신부님의 그 크신 은혜는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이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면서 1년 반이 조금 넘는 그 지긋지긋한 군대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고국으로 돌아와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이듬해에는 고향과 인접한 곳의 백응만 신부님이 명동에서 서품된 후 고향이 같이 가자고 해서 서울에서 황해도 신계군 화천리까지 300리 길을 하루 100리씩 걸어 3일 동안에 걸쳐 갔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는 그것이 고향을 본 마지막 기회였다. 민족 분단은 내게도 엄청난 비극이었다.
사제가 되기까지는 아직도 먼 길을 가야 했고 몇 가지 고초를 더 겪어야 했다. 1947년 여름방학 때였다. 고향을 가지 못하는 우리 30여명은 은사 최민순 신부의 인솔 아래 녹번에 있는 과수원을 지키러 갔다. 하루는 저녁 무렵, 인근의 공장 패거리들이 싸움을 걸어왔다. 김창렬, 이갑수, 이종흥, 이경재 등은 자리를 피해 화를 면했지만 나를 비롯한 몇 명은 미련스럽게 자리를 지키다가 수없이 얻어맞았다.
또 한 가지는 건강 문제였다. 방학이 되어도 고향을 갈 수가 없어서 내내 학교에 남아서 불어 성서 번역을 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너무 무리를 했는지 방학이 끝날 때쯤 되어서는 폐결핵으로 명동에 있는 성모병원에 입원을 하게 됐다. 부제품을 앞두고 있던 나로서는 자칫 실망과 좌절에 빠질 위기였다. 학교 교수들은 수차례의 회의를 통해 부제품 수여를 연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다행히 노 대주교님의 특별 배려로 9월에 동창 12명과 함께 부제품을 받을 수가 있었다. 다른 동창들은 모두 사제직을 위한 막바지 준비에 여념이 없었지만 나는 요양차 용인 양지 본당에서 생활하다가 1950년 4월15일 동창들과 함께 사제직을 받을 수 있었다. 내 생애에서 가장 감사하게 느끼는 일이었다.
유난히 시련과 고난이 많았던 나는 그것을 극복하는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터득해야 했다. 무엇보다 주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성체 앞에 나아가서 주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항상 나의 사제 생활에 대해 염려하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면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다시금 몸과 마음을 추스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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