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것이 낫겠소』
정약종이 하늘을 볼 수 있게 머리를 바로 누이고 드디어 망나니의 춤사위가 시작되자 사형장을 둘러싼 이들의 얼굴에는 숱한 표정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고요한 눈길로 하늘을 향한 정약종, 죽음을 앞두고 이내 가닿을 천국을 그려본 것일까?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이어 초장의 기세는 어디 가고 벌벌 떠는 모습이 역력한 망나니의 칼이 허공을 가르자 군중 속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첫 칼질에 목이 절반밖에 잘리지 않았던 것이다. 정약종은 벌떡 일어나 성호를 그은 다음 다시 처음의 자세로 누워 두 번째 칼날을 받았다.
신도단체 명도회의 첫 회장으로 「천주교가 이 나라에서 가졌던 가장 유명한 인물 중에 한 사람이며, 가장 위대한 순교자 중에 한 사람」이라는 극찬을 들었던 정약종은 그렇게 하느님이 주신 재능과 함께 스러져갔다.
▲ 서소문밖 순교자 현양탑 신유박해로 순교한 100여명의 순교자 가운데 40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신유박해 최대의 순교지 서소문밖에 세워진 현양탑.
무너져가던 조선 조정에 그 술렁임을 끝없이 전해줄 것 같았던 서소문 밖 형장, 오늘 서소문을 찾는 걸음은 가슴 한 곳이 빈 듯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정약종을 시작으로 4월 2일(음) 정철상, 최필제 등이 처형되고, 12월 26일(양 1802년 1월 29일) 홍익만 등 9명이 순교할 때까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회장인 강완숙을 비롯한 황사영 등 초대 한국교회 주역들과 함께 천주교인들의 사형집행장으로 알려진 서소문밖. 신유박해로 순교한 100여명의 순교자 가운데 40명이 순교의 월계관을 쓴 신유박해 최대의 순교지였던 이 자리는 옛 기억을 되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소를 도축하던 곳조차 발걸음 않는 것이 상례인데 하물며 숱한 사람이 죽어간 곳임에랴. 버려진 땅 서소문 밖 형장은 오늘에도 버려진 이들을 품는 서글픈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서소문공원으로 변한 형장 근처에는 20여명의 노숙자들만이 한가로운 여름의 끝자락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은 이 땅의 내력을 알까? 『어떤 곳인지 아느냐』는 물음에 노숙자들에게선 『천주교에서 지었는데 잘 몰라요』『순교 뭐라더라…』 몇 명에게 물어도 비슷한 대답이 돌아왔다.
역사의 아픔과 부끄러움을 지우려 했음인지 서울을 둘러쌌던 4대문 4소문 가운데 유독 서대문과 서소문만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후세의 무관심 속에 채인다.
이후 기해?병인박해 등을 거치며 44위의 성인을 낸 서소문 형장을 거쳐 첫 선교사였던 주문모 신부가 4월 19일(음) 군문효수형을 당한 새남터, 천주교인들을 국사범(國事犯) 반역죄 등의 중죄인으로 다스려 많은 신자들의 목숨을 앗아간, 지금은 제일은행 본점건물이 들어선 서울 종로 1가 의금부 터 등을 차례로 더듬는 발걸음은 무거워지기 십상이다. 그 어느 한 곳 순교의 현장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 향기만은 어디 갈 것인가.
100여년에 걸친 박해를 통해 1만여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탄생한 이 땅. 관원들의 고문으로, 즉결처형으로 곳곳에서 이름도 없이 묻혀간 무명순교자들. 그들을 떠올릴 때면 기념비석조차 남아있지 않은 의금부 터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신앙인의 무관심을 아프게 때리기까지 한다.
아울러 충청지역에서는 「내포의 사도」로 불리며 충청도지역 복음화를 이끈 이존창과 수많은 신자들이 처형된 공주 황새바위와 한양의 형조와 지방 관아에서 고문을 당하고도 배교하지 않은 천주교인들이 이송되어 처형당한 공주에 있던 충청감영 선화당이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다행히도 충청감영은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자리에 있다가 1992년 공주시 웅진동으로 옮겨 그 모습이나마 찾을 수 있다.
▲ 전동성당 호남의 사도 유항검 형제 등이 순교의 향기를 뿌린 전동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