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4월15일 노기남 주교님 주례로 명동성당에서 동기생 12명과 함께 사제품을 받았다. 몸이 아파서 시골에서 1년간 정양한 후였다.
그때 묵상한 것이 시편 32장 5절이었다. 『당신께 내 죄를 고백하고 내 잘못 아니 감추어 「야훼여, 내 죄 아뢰옵니다」 하였더니, 내 잘못 내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그렇게 심약하고 보잘 것 없는 내가 멜키세덱의 품위에 따라 서품이 되면 정말 잘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지금도 그 때 그 시편 구절을 생각하면 내가 참된 마음으로 통회를 할 때 주님은 언제나 자비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시는 분임을 절실하게 깨닫는다.
지금까지 내 삶을 보면 소처럼 일만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정말로 일복을 타고 났는지 본당 사목을 할 때도 네 번이나 성당을 건축했다.
사제품을 받고 처음으로 어려운 본당이었던 곳은 양평이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말 양평본당 주임으로 부임하게 됐다. 성당이 폭격을 받아 폐허가 되어 버린지라 용문에 임시로 성당과 사제관을 지어 사용해야 했다.
노기남 대주교님은 부임 당시 용문에 가 있으면서 천천히 양평으로 본당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옮기려고 할 즈음 용문의 열심한 교우들과 청년들이 결사 반대하고 나서곤 했다.
저녁마다 사제관 앞에서 진을 치던 청년들과 대면했던 나는 어찌할까 망설이던 중 그중 한 청년의 뺨을 두어대 갈겼다.
후에 용문의 회장단이 주교님께 이 일을 고했을 때 주교님은 『신부는 신자들 영신(靈身)의 부모』라며 젊은 신부의 편을 들어 주어 반대 속에서도 본당을 옮기는데 성공했다.
그후 1953년에 양평성당과 용문성당 낙성식을 모두 마치고 1957년 2월에 서울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발령 받아 고생은 많았지만 정도 많이 들고 보람도 있었던 양평을 떠나게 됐다.
1974년 3월에 부임한 화곡동본당 역시 나름대로 무척 어려운 생활을 했던 곳이다. 소신학교에서 건강을 많이 상해 교장직을 사임하고 1년간 휴양을 허락받았는데 채 한 달도 안돼 화곡동본당으로 발령을 받았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수녀원을 매입하고 교육관을 건축했으며 발산동성당을 지어 분가시켰다.
법원리성당은 내가 자청해서 고생을 사서 한 곳이다. 몇 달 동안이나 사제관이 비어있었던 피폐한 본당이었던 법원리본당 문제로 당시 김옥균 주교님이 매우 고심을 했다. 그 사정을 익히 알던 나는 자원의 뜻을 표시했고 허락이 떨어져 1985년 주임으로 부임했다.
우선 사제관을 신축하고 나서 성당과 수녀원 건축, 유치원 수리 등으로 성당의 면모를 새롭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워낙 가난한 시골 본당이어서 건축금은 본당 재정에서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고 결국 다른 본당에 손을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직접 서울의 29개 본당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특별 헌금을 요청했고 그 결과 한 본당에서 천 만원 이상씩 헌금을 해주었고 30여개의 다른 본당에서 수백만원씩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모은 돈이 4억원, 여기에 교구와 본당 자체 기금을 포함해 모두 5억원으로 일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가난한 본당의 성당 건축을 도와준 60여개 본당과 여러 은인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지금도 이 분들을 기억해 기도하며 종종 감사의 미사도 봉헌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내가 절실하게 느낀 것은 바로 고통과 어려움 속에 있는 사람일수록 더 큰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한다는 것이다. 즉 어려운 본당일수록 주님의 도우심과 은총이 더 많은 것을 확실히 느꼈다.
내 사제 생활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18년 동안은 신학교에서 살았다. 1957년 양평본당을 이별하고 가톨릭대학교 교수로 부임해 별과 학생들을 맡아 묵상을 지도하고 라틴어를 가르쳤다. 1년 후 소신학교 부교장을 겸임해 소신학생들을 돌봤다.
18년간의 생활은 어찌보면 그야말로 무미건조하고 따분하기 이를데 없는 변화없는 생활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그 때는 내 나이 36세부터 54세에 이르는,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할 청춘의 시기였다.
새벽 5시 학생들을 깨우고 성당에서 묵상을 지도한 뒤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낮에는 강의하고 밤에는 교회서적을 번역하고 저술하는데 몰두했고 종종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지금까지 펴낸 책은 대략 40여권 정도가 되는 것으로 기억된다. 선종완 신부와 최익철 신부, 나 이렇게 셋이서 「사서삼경」을 만들었고 강론집 「목자의 소리」, 그외에 「천주와의 일치」 「복음을 전하라」 「청소년 문고」 5권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과로로 인해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큰 병을 세 번 앓았는데 그때마다 일년 동안 휴양하고 또 일하고 휴양하고 그렇게 지냈다.
그러다가 동기 신부들이 하나 둘 외국에 나가 공부를 하고 학위를 받아오는 것을 보면서 무척 고민을 했다. 실제로 두 번이나 수속을 밟기도 했지만 과연 내가 유학을 가는 것과 남아서 계속 책을 내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한국교회에 유익한 것일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를 택했다.
이때부터 사명감에 불탄 나는 밤샘을 밥먹듯하면서 저술과 번역에 매달렸다. 지금처럼 인쇄시설이 좋은 때도 아니었기에 애도 많이 써야 했다. 그러다보니 건강을 해치게 됐고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왜 그렇게 무리를 했는지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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