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주제 : 내포 지역의 특성과 사회 구조
개방적 내포 분위기 서학 전래의 통로돼
▶발표자 : 임선빈(충남발전연구원 충청학연구부장)
▲ 김수태 교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넓은 들판 가운데 우뚝 솟은 가야산은 우리나라의 전통지리인식에 의하면, 백두대간을 근원으로 하여 갈라져 나온 금북정맥의 정기가 모여 있는 곳이다. 내포지역은 동으로는 죽산의 칠현산에서 남쪽으로 치달리는 금북정맥의 본줄기에 가로막혀 충청도의 내륙지방과 격리되어 있었고, 남으로는 오서산에서 보령의 진당산으로 갈라지는 금북정맥의 작은 갈래에 의해 구분된다. 이 곳은 지형이 대체로 완만하고 해안의 굴곡이 심한데다가, 바다의 조석간만의 차가 커서 곳곳에 안개(內浦)가 형성되는데, 그 가운데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삽교천 주위가 가장 크게 발달하였다. 내포의 교통로는 곳곳에 발달한 포구를 이용한 수로가 중심이었다. 조선시대 역로의 주요간선로에서 비켜 있었던 내포지역의 육로는, 서울에서 충청수영에 이르는 도로망과 함께, 서울로 가는 지름길인 대진나루, 충청도의 행정중심지였던 공주와 통하는 차령(차동)고개가 중요하였다.
조선시대 내포지역 수령 상호간에는 일반행정상으로 상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병렬적인 관계였지만, 군사적으로는 홍주진관의 관할하에 놓여 있어서, 홍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였고, 각 고을의 군수는 병마동첨절제사, 현감은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
내포의 지리적 조건은 내포의 독특한 역사적 특징을 지니게 하였다.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개방되어 있을 때에는 외국문물 수용의 창구역할을 하였으니, 고대 불교문화의 전래, 안흥과 당진항의 발달 등이 그것이다. 반면에 대외적으로 바닷길이 폐쇄되어 있을 때에는 잦은 외국 세력의 침투가 이루어졌으니, 여말선초 왜구의 출몰과 조선후기 이양선의 출몰 등이 그것이다. 내포지역에서는 고려말에 성리학의 수용에 앞장섰으나,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성리학적 분위기가 경직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기도 하였다. 내포사람들은 일찍부터 바다를 이용할 줄 알았다. 생선과 소금을 만들어 서울과 내륙을 드나들며 팔았으므로 이 지역에 상업이 발달하였고, 구릉지 개발과 해만간척을 통해 확보한 농경지는 사족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이와 같은 열린 해로와 풍요롭고 개방적인 내포지역의 분위기는 조선후기 서학(천주교)이 전래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 제2주제 : 사도 이존창과 내포 신앙 공동체의 형성
‘가성직단 신부’로 활동 애긍 실천에도 앞장
▶발표자 : 김수태 교수(충남대학교)
▲ 임선빈 연구부장
내포지역에 자리 잡게 된 천주교는 서울과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양반·중인층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양인이 중심이 되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박해가 거듭될 때마다 내포의 신앙공동체는 더욱 탄탄해지면서 천주교를 충청도 이외의 경상도 및 강원도 등 더 넓은 여러 지역으로 확산시켜 나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내포지역의 천주교 신앙공동체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한 인물은 이존창이다. 그가 내포 신앙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에 보여주었던 공헌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충청도 지역의 초기 천주교회사는 마치 그의 활약상을 보여 주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에 샤르르 달레는 오늘의 우리 교우들 대부분이 그가 그때 입교시킨 사람들의 후손들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는 오늘날까지 내포의 사도로 불리어지고 있다.
사실 그는 조선 후기의 사회적 흐름 속에서도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새로운 사상인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면서 내포지역의 문화적 특성으로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진보성·개방성·저항성을 새롭게 열어준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는 주자학을 그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던 충청도 내륙지방의 공주문화권이 가지고 있던 보수성과는 다른 차별성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또한 그 자신 일반 양인 출신이었던 이존창은 천주교 신앙공동체를 통해서 내포 지역의 민중들에게 새로운 모습의 조선사회를 꿈꾸며, 그러한 이상을 그와 함께 추구하기를 바랐던 역동적인 모습을 드러내 주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사회의 발전을 추구한 내포지역의 근·현대사 인물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존창이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형성된 내포 신앙공동체의 특징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전교활동에서 드러난 사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내포 신앙공동체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내포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을 때 사람들의 집단적 입교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
내포지방의 집단적 개종 현상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우선 이존창의 개인적인 재능과 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식과 덕행과 같은 위대한 재능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다. 특히 1786년에 시작된 「가성직단」의 신부로서 그가 활동한 것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집단개종과 관련하여 내포 신앙공동체의 또 다른 특징으로 살필 수 있는 것은 애긍의 실천이다.
이러한 애긍의 실천은 내포지역 사회의 공동체적 사회질서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부유한 사람들의 자발적인 공동체 의식에서 나온 부분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 고통을 함께 할 것을 요구하는 일반인들의 요구가 다른 지역에 비해 훨씬 강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