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4년의 일이다.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성신중고등학교 동문회 창립 총회와 체육대회가 열렸다. 졸업생과 가족 350여명이 옛 교정에 모여서 과거 학창시절을 돌아보고 우애를 다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소신학교에서 2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던 나 역시 정말 오랜만에 제자들을 만났고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성신중고등학교는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으로 신부가 되려는 꿈을 안고 학업과 성덕을 연마하는 학교였다.
제자들을 만난 나는 잠깐 혼란스러웠다. 신학생이었던 제자들이 저마다 젊은 처자의 손을 잡고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끌고 내 앞에 와서 인사를 하자 나는 그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던 것이다. 마음 한켠으로는 열심히 공부했던 학생들이 사제가 되지 않고 다른 길을 걸어갔다는 사실이 조금은 안타깝기도 했다.
하지만 사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잘 알지 못했던 철부지 학생들, 왜 신학교에 왔느냐 하는 물음에 빵이 먹고 싶어서 왔다며 엉뚱한 대답으로 나를 당황하게 했던 사랑스러운 제자들, 그 제자들이 이제는 또 다른 길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여전히 그 제자들을 향한 애틋하고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지 15년이 지났을 때 우리나라에서는 대학 예비고사가 생겨났다. 지금의 수능에 해당되는 시험이었지만 점수로 나오는 지금과는 달리 그때는 합격, 불합격을 판정하는 시험이었다.
그래서 예비고사에서 떨어지면 소신학교에서 대신학교로 진학을 할 수 없었다. 교장이었던 나는 마음이 급했다. 소신학교에서 무려 6년 동안이나 사제를 향한 길을 걸어왔던 학생들이 만약에 예비고사에서 떨어져서 대신학교를 가지 못한다면 교회로서 볼 때 얼마나 큰 손실이며 개인으로는 또 얼마나 큰 좌절이 되겠는가를 생각할 때 밤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과 수험 준비를 함께 했다. 고등학교 1, 2학년 때에는 9시가 넘으면 모두 잠자리에 들어야 했지만 고3 학생들은 12시까지 잠을 재우지 않았다. 아침 일찍 학생들을 깨우고 밤 늦게까지 자율학습을 지도했다.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고3 학생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더 늦게 잠자리에 들어야 했다.
시험공부는 학기 때만이 아니었다. 여름방학 때에도 고3 학생들은 쉴 수가 없었고 덩달아 나 역시 편안하게 방학을 보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학생들과 한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한 결과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90% 이상이 시험에 합격을 했고 안타깝게도 떨어진 학생들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분발해서 다음해에는 또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너무 엄격하고 때로는 심하다고 할 정도로 학생들을 다뤘던 것이 마음에 걸린다. 물론 그 모든 것이 학생들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그 결과도 나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때 혹시라도 나 때문에 마음을 상한 제자가 있다면 그것은 내 탓이고 지금이라도 겸허한 마음으로 용서를 청하고 싶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다. 그래서 결국은 1974년 3월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정든 소신학교를 부득이 떠나야 했고 1년간 휴양을 하기 위해 쉬던 중 앞서 말한대로 화곡동본당 주임으로 발령을 받았다.
사제로서 사목활동을 하면서 누구보다 절실하게 느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건강이다. 나는 미련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기도 하고 하루에 5분도 쉬지 않고 일하다가 병원 신세를 진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후배들을 만나면 항상 강조하는 것이 운동이다.
술도 한 때 너무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치기도 했다. 지금은 하루에 한 시간 이상씩 걷는 운동을 하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아 건강이 많이 좋아진 편이다. 후배들에게도 일주일에 하루는 몸과 마음을 모두 푹 쉬게하고 매일 조금씩이라도 운동을 하라고 입이 마르도록 권고한다.
사제생활을 오랫동안 하면서 사제로서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정신이라고 느낀 것은 대략 네 가지 정도이다.
먼저 사제는 용감해야 한다. 그 용기는 사제적 열성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데 어떤 시련과 고통 중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관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모두 만나야 하는 것이 바로 사제의 삶이다. 그런 만큼 옹졸한 마음을 갖지 말고 이해하고 용서하며 너그러워야 한다. 나 역시 사제 생활을 하면서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 나이를 먹고 나니 그런 모습들에 대해서 용서를 빈다.
세 번째는 기도와 봉사의 삶이다. 사제는 모든 것을 거저 받았으니 거저 준다는 봉사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또 기도는 사제의 힘이다. 기도 생활에 소홀하면 사제생활을 제대로 해나갈 수 없다. 나는 나름대로 기도생활에 충실하기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실천한다. 미사 30분 전에 성당에 들어가서 묵상과 성무일도를 한다든가, 고해성사를 준다.
마지막으로 사제는 청렴 결백해야 한다. 금전에 욕심이 없는 청렴한 생활은 본당의 발전과 신자들의 성화에 정비례한다. 공적이건 사적이건 그 본당에서 생긴 재물은 그 본당을 위해 사용함을 원칙으로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면서도 아름다운 일이다.
사제 생활을 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 것 중의 하나가 사회 인사들과의 접촉이다. 나이 60이 넘어가면서 어떤 계층의 사람들과도 거리낌없는 교제를 할 수 있었다. 본당신부로 사목할 때에는 군수나 경찰서장들과 친구처럼 지내고 학교 교장선생님들과 각별한 친교를 맺기도 했으며 목사님 등 다른 종교의 성직자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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