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2일부터 6일까지 한티 피정의 집에서 원주교구 사제 피정이 있었다. 그곳 식당에는 용서에 대한 이런 시가 적혀 있었다.
『주님 새로 사주신 운동화 한 짝을 잃어버리고, 호랑이 할머니네 장독 뚜껑을 깨던 어린 시절에는 용서받는 것만 어려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주님 이제는 용서받기보다 용서하기가 더 어려운 줄 알겠습니다. 제 마음에 상처를 주고 저를 업신여긴다고 생각되는 이들을 용서하기가 어찌 이리 어려운 지요 ?
주님 용서하게 하소서. 용서만이 상처 준 사람과 상처받은 사람을 함께 자유롭게 하는 길임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몇 번을 읽으면서 내게 상처 준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그 상처 때문에 순간순간 괴로워하는 자신을 보면서 용서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러면서 느끼는 것은 용서란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만이 용서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용서할 수 없는 상황이 닥칠 때, 잠시 그 자리와 상황을 피하면서 그 상황을 주님의 눈으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오늘 복음은 지난주에 이어 계속해서 공동체 규범을 다루면서 용서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형제가 잘못하면 몇 번 용서해야 하는가? 일곱 번이면 되겠는가? 아마 이 질문을 통해서 베드로사도가 원했던 답, 어쩌면 우리 모두가 기대하고 있었던 답은 당연히 『그래 일곱 번이면 된다』라는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으로 엄청난 말씀을 하신다. 일곱 번이 문제가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란다. 물론 여기서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7과 70은 모두 상징적인 수로 이 말은 「무한한 용서」 「끝없는 용서」를 의미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한번도 실천하기 힘든 용서를 끝없이 용서하라니! 그 이유가 오늘 복음 후반부에 나온다.
오늘 복음 후반부에는 무자비한 종의 비유가 나온다. 여기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는 가히 천문학적인 숫자이다. 1달란트는 약 6000 데나리온이다. 당시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이 일 데나리온임을 생각해보면 일 달란트는 이자를 제외하고 노동자가 16.45년의 품삯을 모은 금액이다. 그러기에 일만 달란트는 164,500년 동안 노동자가 먹지 않고 입지 않고 모아야만 하는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비유는 이런 어마어마한 금액을 탕감 받은 이 사람이 자신에게 100데나리온 밖에 안 되는 빚을 진 채무자에게는 냉혹하게 대했다는 것이다. 왕의 자비와 용서, 종의 무자비함과 비정함이 대조를 이루는 비유이다.
그러면 여기에 나오는 일만 달란트를 빚진 뻔뻔한 종은 누굴까? 그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하느님에게 엄청난 빚을 지고 살아가면서도 이웃의 잘못에 대해서는 냉혹한 우리, 자신이 탕감 받아야 할 빚에 대해서는 자비의 잣대로 해석하면서 자신이 용서해주어야 할 빚에 대해서는 엄격한 이중 잣대를 사용하는 우리, 자신이 갚아야 할 빚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면서 자신이 권리를 가지고 있는 채무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이 비유가 주고자 하는 뜻은 자명하다.
먼저 이 비유는 우리 자신을 보라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용서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하느님의 무한한 용서와 자비를 입고 사는 존재가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을 때, 왜 우리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어야 하는가 하는데 대한 하나의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 이 비유는 유다교에 대비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새 규범을 보여주고 있다?(이 장이 공동체 설교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유다교는 율법의 정의를 그들의 규범과 가치로 삼았지만 우리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삶은 단순한 규정이나 정의의 추구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본받아 율법의 정의를 넘어서는 용서와 자비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규범이 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이 말씀은 새로운 교회 공동체가 가져야 할 규범으로써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면서 남을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용서받고 있고 용서받아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요구가 바로 오늘의 말씀이 주는 교훈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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