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렇게 돌아가고 있는데도 우리나라가 지금만 같다면 언젠가는 이 일로 큰 낭패를 볼 것이 분명하오!』
누구나 주눅들게 할 표정의 포도청 판관 앞에 선 김대건 신부는 당당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어머니의 땅에 닥칠 미증유의 파국을 예견하고 있었음인지 그의 목소리에는 안타까움마저 배어 있는 듯했다. 6월 5일 잡힌후 한양 포도청에 도착하기까지 이미 수 차례의 문초로 지칠 대로 지친 그였지만 관리들 앞에 서면 묘한 힘이 솟아올랐다.
김신부가 갖춘 깊은 학식과 해박한 지식이 바탕이 된 논리에 윽박지르길 일삼던 관리들 가운데서도 그의 고매함에 빠져드는 이가 한둘씩 생겨났다. 박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이 요청한 세계지도를 그려주는가 하면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들려주곤 했던 것이다. 6년간의 마카오 유학생활과 4년여에 걸친 중국 만주 대륙에서의 활동, 사선을 넘나들며 얻은 학식과 견문은 옥중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내가 지닌 모든 재능과 힘을 하느님과 이 땅을 위해 쓸 수 있다면…」
옥살이가 길어질수록 김신부의 마음 한 곳에서는 이런 바람이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옥중이라고 주님께서 맡기신 소명을 잠시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일로 잡혀온 임치백에게 세례를 베푸는가 하면 갇힌 이들에게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 치백은 이런 김신부의 노력으로 옥중에서 영세한 두번째 성인이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한편 김신부의 신분과 학식에 놀란 조정은 40여차례에 걸친 심문과 어전회의까지 열어가며 처리방안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런 때 프랑스 함대가 홍주 앞바다에 나타나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앵베르 주교와 모방.샤스탕 신부의 문제로 문책 소동을 벌이자 당황한 조정은 김신부를 서양 선박을 불러들인 역적으로 몰아 죽이기로 결정하고 말았다. 이 결정이 있고 이튿날인 1846년 9월 16일, 김신부는 서울 수비를 맡고 있던 어영청으로 이송된 후 처형장으로 사용되던 새남터로 향하게 됐다.
한양성에서 10리나 떨어진 한강변 새남터에는 벌써부터 사형집행을 보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형장 한가운데는 깃발을 단 창이 꽂혀 있고 군졸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김신부가 도착하자 군졸들이 달려들어 옷을 벗기고 두 귀에 화살을 꿰고 얼굴에 물을 뿜은 후 회를 발랐다. 이윽고 어영대장의 호령에 망나니가 된 군사 10여명이 김신부의 주위를 빙빙 돌며 칼로 내리치니 8번째 칼날에 목이 떨어졌다.
김신부의 순교 후 9월 20일 현석문도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포도청에 남아 있던 임치백과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교수형으로 순교의 월계관을 받으니 박해가 막을 내리게 됐다.
다시 찾은 새남터, 『…천주를 위해 나는 죽어갑니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죽어가며 마지막 남긴 말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에 한동안 일어설 수 없었다.
「…천주의 밭은 이 세상이고, 인류는 좋은 씨앗이외다. 천주께서는 이것에 비료를 베푸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황송하옵게도 인간이 되어 돌아가신 아드님의 귀한 피에 우리들을 적셔 기르시고, 성서로써 우리들을 가르치시고…성령으로써 끊임없이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사랑하는 교우들이여, 천국에서 그대들과 같이 만나 영원한 복을 즐기게 될 것을 바라고 있소. 그대들을 정답게 껴안아 주겠소」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교우들에게 보낸 마지막 옥중 편지 구절이 더욱 애절하게 읽혔다.
그러나 모두 11명의 성인을 탄생시킨 성지치고는 후손들의 손길이 부족하다는 느낌에 안타까움이 솟아오른다. 가족과 함께 성지를 찾은 신재욱(아나다시오.38.서울 노원본당)씨는 『지나치면서 여러 번 보긴 했지만 들어오는 길이 만만치 않아 지금에서야 찾게 됐다』며 『이렇게 중요한 성지에 대한 관심이 부족한 것 같아 안타깝다』고 밝혔다.
증조부대부터 순교자들로 일가를 이룬 집안에 태어나 숱한 박해 가운데서도 뿌리 뽑히지 않음은 하느님의 안배하심이었던가. 고된 유랑생활을 하며 한 차례도 마음 편히 한 곳에 머물러 보지 못했던 김 신부, 그가 사제품을 받고 이 땅에 들어와 첫 사목활동을 펼친 경기도 은이공소는 그래서 더욱 감동 속에 다가온다.
김신부의 순교 40일 후 전교를 돕던 이민식(당시 17세)이 관헌들의 눈을 피해 그의 시신을 200여리 떨어진 미리내로 모셔와 안장하니 이후 이곳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을 증거하는 성지가 됐다. 박해를 피해 숨어들어 여기저기 흩어져 화전을 일구고 살던 신자들의 집들, 밤이면 달빛 아래 초롱불들이 은하수처럼 보인다 하여 미리내라고 불리게 된 이 곳은 지금도 신자들의 정신적 안식처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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