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순례」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나섰던 성지를 찾는 길은 어느덧 늘 마음 한 곳에서 불현듯 솟아오르는 아픔에 어디가 저린지도 모르는 가슴을 붙들고 나서는 길이 되고 말았다.
『나는 천주를 모르오』 『나는 천주교를 믿지 않소』라는 한마디 말이면 풀려나거나 누려왔던 부귀영화 이상의 삶이 보장돼 있었건만 그 모든 것을 초개처럼 버리고 「이름도 없이」 죽어간 순교자들. 이 땅의 성지 몇 곳을 둘러본 한 외국인 주교는 『「이름없는 죽음」이라는 말 앞에 한없이 숙연해질 뿐』이라는 말로 1만명에 이르는 무명순교자를 낸 한국교회에 놀라움을 드러낸 적이 있다.
무엇이 숱한 무명순교자들로 하여금 그 길을 걸어가게 했을까. 한달여에 걸친 성지순례를 마치면서야 그 까닭을 조금씩이나마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짐작만 할 뿐 누가 「목숨」을 내놓은 그 숭고한 삶을 제 나름의 감상만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성지를 찾으며 갖게 된 생각은 「보존이냐 개발이냐」는 항간에서도 적잖이 듣게 되는 논리적 대립이다. 보다 많은 신자들이 쉽게 성지를 찾게 하기 위해 개발이 우선돼야 한다는 논리와 최대한 순교 역사를 되살려 낼 수 있도록 보존에 힘써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모두 나름의 타당성을 지닌 말들이지만 우리의 성지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역사성을 떠올리게 된다면 우선 「보존」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쪽에 생각이 미치게 된다. 우리나라 근대화의 역사 속에 신자들 뇌리에 성지라는 의식이 제대로 뿌리내리기도 전에 개발된 성지의 모습은 옛 현장을 떠올리며 감동을 나눠 갖기에는 버거운 경우가 많은 게 오늘의 현실이다.
성지라는 이름만 있을 뿐 성지의 역사성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곳이 적잖아 순례를 하며 당황해본 경험을 누구나 한두번쯤은 지니고 있을 터이다. 이 또한 우리 역사가 지닌 아픔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역사는 있되 역사의 현장은 없다면 그 감동은 그 만큼 반감되고 말 것이라는 게 성지를 둘러본 후 갖게 되는 소박한 결론이다.
『이 땅에 그리스도의 사랑과 평화가 자라나고 열매 맺은 현장』
이번 순례길은 이런 말로 성지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더욱 성지순례가 단순히 우리의 현재를 있게 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무한의 미래까지 내다본 순교선조들의 숨결을 가슴 한 곳에 받아 안으며 성지는 과거를 통해 현재의 살아갈 바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미래의 기쁨에 동참하는 살아있는 현장임을 배운다.
수백년의 시공을 뛰어넘는 어떤 느낌을 나눈다는 것은 분명 삶을 선택하는 일에 비하면 너무도 쉬운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된 길,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소중한 「생명」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간 그들을 마음에 담고 돌아선 길은 그래서 자랑만 해선 안될 길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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