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 자발적으로 가난 수용
선교활동통해 공동체 점차 발전
▶발표자 : 김기만 신부(대전가톨릭대학교)
▲ 김기만 신부
내포지역 신앙공동체가 설립되고 발전하게 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존창(李存昌) 공사가의 루도비코이다. 그는 1784년 또는 1785년 초에 신앙을 수용하였고 그의 고향인 충청도 예산의 여사울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는 양인(良人) 출신으로 여러 계층에 넓은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런 관계가 전도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내포지방에서 천주교가 급격히 확산되게 만든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지역이 지니는 개방적 태도 때문이기도 하였다. 수로를 중심으로 여러 상업 활동에 개방되어 있었고 중국과의 밀수도 흔히 행해지는 지역이기도 하여 비교적 외래의 문물에 대하여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1801년 순교하게 되는 강완숙 골롬바의 경우 서적을 통하여 천주교를 알게 되었고 이런 서적들이 호우(湖右) 일대에서 거의 집집마다 전파되어 읽히고 있었다. 또한 한글로 번역되어 부녀자와 어린이들까지도 이 서적을 접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는 1795년을 전후하여 이미 10여종의 한글 서적들이 있었고 1801년에는 80여종에 달하는 것을 보아서 이런 한글 서적과 한문으로 이루어진 다른 서적들은 천주교가 구체적인 선교사의 가르침에 의존하지 않고도 점차 확산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내포 지역 신자공동체는 주로 농업과 상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앙을 갖게 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외교인들에게 전교를 하거나 혹은 가난한 이웃을 돌보기 위하여 대부분의 경우 자발적인 가난을 수용하였다. 이도기의 경우 대여섯 번이나 이사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특히 이런 불안정성은 선교를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한계였다. 신자들은 자신들이 신앙에 대한 설명을 요청 받는 경우 비교적 적극적으로 신앙에 대한 설명을 하고자 하였고 나아가 때로는 자기편에서 먼저 잔치 등을 열어 신앙을 설명하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내포지역의 신자공동체는 이런 선교활동을 통하여 점차 확산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신자 각 개인의 변화된 삶도 외교인들로부터 신앙을 갖도록 하는데 큰 매력으로 작용하였다. 자신에 대한 승리가 자신의 선교 활동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며 큰 도구가 되었다.
■ 제4주제 : 내포 지역의 복음 전파와 사목 중심지 조사
민중종교운동 형태로 복음 확산
배티.둠벙이 등이 사목중심지
▶발표자 : 차기진 박사(양업교회사연구소)
▲ 차기진 박사
물론 초기의 신앙 공동체는 대부분 천주교 신자와 비신자가 혼거하는 「혼거형」이었다. 그러다가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 복음의 확대가 이루어지면서 산간 지대에 교우촌 즉 『신자 공동체형』이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그 결과 이 시기의 신앙 공동체는 평야 지대의 혼거형과 산간 지대의 신자 공동체형으로 구분되었다. 다음 단계는 1839년의 기해박해 이후에 해당한다. 즉 1850년대까지 평온이 계속되면서 내포의 평야 지대에도 신자 공동체형(교우촌)이 형성되어 갔으며, 1850년대 선교사가 순방하는 시기에 와서는 각처의 공소가 신자 공동체형과 혼거형을 한데 묶는 지역 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내포 지역의 첫 사목 중심지는 진천의 배티(최양업 신부)와 공주의 둠벙이(다블뤼 신부) 등으로 모두 1853년을 전후하여 사목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그후 1861년 10월에 정식으로 지역 본당이 설정되면서 덕산 황모실(랑드르 신부), 보령 판서골(다블뤼 주교), 공주 진밭(리델 신부), 공주 둠벙이(죠안노 신부)가 본당 중심지가 되었으며, 1863년 이후에는 다블뤼 주교의 본당 중심지가 판서골 대신 홍주 거더리로 변모되었다. 또 1864년의 사목 관할 구역 변경 때는 칼래 신부가 목천 소학골에 본당 중심지를 두었고, 이곳은 1866년 10월 칼래 신부가 중국으로 탈출할 때까지 본당 중심지로 존속되었다. 박해 시대 한국 천주교회 최후의 본당 중심지였던 셈이다. 내포 교회는 처음부터 하층민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민중종교운동의 형태로 복음이 전파되어 나갔다. 또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타 지역으로 이주해 간 신자들은 중인층 이상이 많았으며, 따라서 내포 지역 교회는 보다 더 하층민 중심으로 변모해 가게 되었다.
현재는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의 전국 순교자수를 8000명 내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866년의 전국 신자수는 2만3000명이었다. 한편 기록에 나타나는 내포 순교자수는 대략 334명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 추정되는 내포 순교자수를 2600여명으로 보았을 때, 이는 병인박해이후 전국 순교자수 대비 32.6%에 달하는 수치다.공주 순교자가 193명, 홍주 순교자가 89명, 해미 순교자가 52명이었다. 이 32.6%라는 비율을 1866∼1870년 사이의 전국 순교자 8000 명에 대비해 보면, 내포 순교자수는 2600명 정도가 된다. 그리고 1866년 당시 내포 지역의 신자수는 대략 7500명(2만 3000명의 32.6%)으로 추산된다. 아울러 기록상의 순교자 비율을 2600명이란 숫자에 비교해 보면, 각 지역별 최대 순교자수는 대략 공주 1503명(기록상 : 193명, 57.8%), 홍주 692명(기록상 : 89명, 26.6%), 해미 405명(52명, 15.6%)에 이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