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마지막 주일, 군종교구 동해본당은 모처럼 기분좋은 술렁임에 하루를 시작했다. 김정환 신부가 본당주임으로 온 후 모처럼 여는 병사들을 위한 잔칫날이기 때문이다.
『많이 먹고 가요』『옛, 알겠습니다!』
신병교육대에서 온 이등병 계급장도 못 단 훈련병은 김 신부의 토닥임에 입에 물고 있던 국수가 튀어나올 뻔했다. 한적한 성당에 어울리지 않은 큰 목소리에 한 곳으로 눈길이 쏠렸던 신자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떠오른다.
도회지본당에서는 그리 큰 힘이 들지 않을 이날 행사를 위해 동해본당 신자들은 며칠 전부터 조바심을 쳐야 했다. 신자라고 해봐야 군 간부들을 중심으로 가족까지 합쳐 20여명이 고작이기 때문이다. 이런 본당신자들의 고민을 덜어준 게 김신부가 사목활동을 펼쳤던 서울 낙성대본당 신자들의 방문이었다. 이들이 김신부의 영명축일 축하 겸 병사들을 위한 잔치 준비에 힘을 보탠 것이다.
토요일 오전 성당에 도착한 이들의 손엔 600여명분의 각종 음식 재료들이 들려 있었다. 이날 새벽 3시가 넘도록 두 본당 신자들은 얘기꽃을 피우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김밥과 국수 재료를 장만했다. 주일 아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느 때보다 일찍 찾은 성당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일찌감치 나온 이들의 손놀림이 분주하기만 했다.
태풍 피해가 완전히 복구되지 않은 탓에 군인들의 손길을 청하는 데가 많아 이 곳에서도 오늘같은 날은 오래간만이다. 500그릇이 넘는 국수는 병사들의 손에 이내 바닥을 드러낸다. 영내에서 점심을 앞둔 병사들은 국수에서도 사랑을 느꼈을까 식탁을 떠날 기색이 없었다.
대학교를 다니다 입대해 훈련을 받고 있는 박상균(요셉) 훈련병은 성당에서 갖는 잠시간의 휴식에 마치 천국에 와있는 듯한 표정이다.
『예전부터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심코 지나쳐왔던 생활이 아깝다는 생각도 많이 듭니다』
이런 병사들 때문에 김신부를 비롯한 본당 신자들은 늘 안타까움에 한 주 한 주를 보내야 한다.
『신자수가 몇 안 돼 힘을 모으더라도 늘 마음에 안 찰 때가 많지요. 그래도 우리라도 꾸준히 씨를 뿌려야 되겠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 병사들을 위한 잔치에는 서울 낙성대본당 신자들이 힘을 보태 훈훈함을 더하고 있다. 이날 500그릇이 넘는 국수는 병사들의 손에 이내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 신자들의 한주 : 늘 미안함으로…
폭우가 맹위를 떨치던 지난 8월 전례분과장 이선묵(야고보.40.뇌종부대 신병교육대장) 중령은 하루도 마음 편히 잠자리에 든 날이 없었다. 예상외의 폭우로 이미 곳곳에서 안타까운 사연들이 전해져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에게도 혹여나…」하는 생각에 밤잠을 설칠 때가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이중령이 야간순찰이라도 돌아야겠다며 옷을 주섬주섬 입을 땐 부인 한숙자(로사.38)씨도 병사들의 간식거리라도 없을까 집안 이곳저곳을 뒤지기 일쑤다. 「초코파이라도 좀 더 사둘걸」.
다행히 인명 피해는 나지 않았지만 몸담고 있는 부대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어 한달이 넘게 복구를 하고 있는 중이어서 정상퇴근하는 날이 거의 없었던 지난 한달이었다.
『한명 한명이 아들 형제 같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지만 늘 마음뿐인 것 같아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이 관할하는 곳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병사가 있으면 늘 먼저 살피지 못한 게 자신의 불찰인 양 미안하기만 한 이중령. 그런 그의 몫을 채우기라도 하듯 본당 성모회장을 맡고 있는 부인 한씨는 본당 활동에 더더욱 열심이다. 아이들과 지내는 때보다 병사들이나 본당신자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아 미안할 때가 적잖다.
『여건이 좋은 곳에서 조그만 베품에 만족하던 때보다 간절함을 느끼는 요즘 더 많은 것을 깨달아 가는 것 같습니다. 이 간절함을 오래도록 잊지 않고 많은 이들과 나눠 군사목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이씨 부부처럼 스무명 남짓한 신자 대부분은 성당이고 부대에서고 할 것 없이 자상한 부모로 병사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물론 수시로 있는 병사들의 모임을 위한 간식 마련, 위문 활동 등으로 성가정의 일원으로, 군의 책임자로, 본당의 기둥으로 1인3, 4역은 거뜬히 해내고 있다.
이런 나눔 말고도 이곳 신자들은 외부로도 눈을 돌려 꾸준한 나눔을 이어오고 있어 모범이 되고 있다. 지난 7월 춘천교구 간성본당이 화재로 전소되자 가장 먼저 달려가 아픔을 나누고 일손을 보탰던 이들도 동해본당 신자들이었다. 올 10월과 연말에는 2차 헌금을 통해 조그만 정성이지만 마음을 전할 계획도 세워두고 있다. 10여명의 여성신자들로 구성된 레지오는 춘천교구 동명동본당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 미사 참례한 군인 신자들이 영성체 하고 있다.
# 보이지 않는 삶 : 우리는 조연
「모든 어려움은 우리 발걸음으로 메워야 한다」
김정환 신부의 한 주 한 주는 이런 다짐의 연속이다. 관할부대가 맡고 있는 지역이 전방철책선 28.5km을 포함해 해안선까지 여느 전방부대에 비해 3배나 넓어 잠시도 쉴 짬이 없다. 관할 내 8개 공소의 미사를 일일이 챙겨야 하는 것은 물론 세례자 양성, 부대 위문 등으로 돌아서면 새로운 일들이 숨가쁘게 다가선다. 그의 발걸음을 필요로 한 소초만 50여곳이 넘는다.
병사들의 야간행군이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김신부의 발걸음이 먼저 가 기다린다. 최근에는 수마로 철책마저 휩쓸려 내려가 길도 없는 위험천만한 곳을 간식을 넣은 자루를 짊어지고 찾아다니기도 했다.
『병사들에게 늘 누군가가 함께 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쉽게 손을 벌릴 데라곤 성당을 지키고 있는 군종병이 고작이다. 더군다나 이번 폭우로 공소 한 곳이 흔적도 없이 쓸려 내려가 40명의 신자병사들을 일일이 챙겨야 하는 데다 나머지 공소들도 낡을 대로 낡아 늘어난 신자들을 감당해내기 힘들어 그의 몫은 늘어만 간다.
『우리는 조연일 뿐이지요. 주연이신 주님의 도구로 제 몫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삶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런 김신부를 포함한 동해본당 신자들에게 자매결연을 맺은 외지 본당과 신자들의 손길은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된다.
올 여름부터 동해본당을 찾고 있는 서울 낙성대본당 김화자(세실리아.57)씨는 『우리의 손길이 보다 의미있게 쓰일 수 있는 곳을 찾게 돼 기쁘다』며 『보이지 않는 곳, 힘든 곳에서 이렇게 애쓰는 이들로 하느님나라가 넓혀져 가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