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 코비 박사는 습관을 「지식과 기술 그리고 욕망의 혼합체이다」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지식이란 우리가 무엇을 해야하고 또 왜 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고, 기술은 「방법」, 그리고 욕망이란 하고 싶어하는 「동기」를 말하는데, 우리가 생활하면서 무엇인가를 습관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상의 3가지 모두를 가져야만 한다고 한다.
신앙의 「덕」이란 말도 「좋은 습관」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에 이를 위해서도 이 같은 요소 즉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는 방법, 그리고 올바른 동기가 있어야 되는 것이고, 만일 이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잘못될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이 바로 이같은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어느 임금의 잔치 비유를 보게 된다. 이 비유는 예루살렘의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세가지 비유 중 마지막 비유로서 내용은 이렇다.
어느 임금님이 혼인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불렀으나 초청된 사람들이 초청에 응하지 않자 임금은 군대를 풀어 미리 초청된 자들을 살육하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잔치를 베푼다. 그러나 초대에 응한 사람이라도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아낸다는 것이다. 이 구절을 해석하면 여기서 「먼저 초대받은 이들」은 오늘 비유의 대상이 되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로 그리고 「나중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천민과 이방인들」로 보면 무난할 것이다.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들 중, 세 사람이 연달아 거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는 「모조리」 그리고 「결정적으로 거절」했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적대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군대를 풀어 그들을 죽이고 동네를 불살라 버렸다는 것은 독립전쟁 당시 로마군이 유다인들을 살육한 역사적 사실을 신앙의 눈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후반부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은 쫓겨난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혼인 잔치(「잔치」는 흔히 「종말의 축복」이나 「천국의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임)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예의인 「예복」은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복」이라 함은 「산상수훈」이나 「사랑의 이중 계명」등 「복음의 요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왜 이방인들과 천민들이 중심이 된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성격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는 하나의 「선물」인 동시에( 먼저 무상으로 초대된다는 의미에서) 「보상」이라는 (「초대에 응한 사람」과 「예복을 입은 사람」만이 잔치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왜 백성의 지도자들이 하느님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하나의 가능성은 「지식의 부재」가 그 원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직접 볼 수 있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임금의 초대장이요, 임금의 초대라면 누가 거부하겠느냐마는 하느님의 초대는 예수님을 통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결단을 요구하는 초대였기에 여기에는 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당시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면서도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배척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문제는 바로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초대」를 올바로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의 「무지」가 바로 하느님의 초대를 거부하게 된 원인이었던 것이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라는 표현이 예수님의 행동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일 것이다. 초대를 거부하는 이유로 성서에서는 어떤 사람은 「밭」으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러 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밭」과 「장사」가 상징하는 무엇을 위해 하느님의 초대를 뒤로하고 있는데 이는 가나안 정착 이후 예언자들이 계속하여 고발해온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악」이 당시 지도자들 안에서도 되풀이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당시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박해한 이유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기득권」에 대한 예수님의 도전이 더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은 삶의 현장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초대를 알아 볼 수 있는 지혜로운 눈을 가짐으로 「놓고 싶지 않은 무엇」 때문에 「하느님을 대적했던 당시 지도자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해서는 안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무거운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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