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하권 몬시뇰
나에 관한 이야기전에 우리 집안이 교회와 인연을 맺게된 경위를 먼저 말하고자 한다.
원래 서울에 살던 우리 집안은 10대조부가 「참판」이란 벼슬을 그만두고 경북 선산으로 이주하면서 경상도 사람이 됐다. 세월이 흘러 조선조 말엽에 이르러 큰할아버지인 정운익 어른께서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올라가 상업은행 본점이 있던, 퇴계로 근처 친척집에 머물게 된다. 큰할아버지는 「신언서판」(身言書判,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을 겸비한 출중한 인재였다. 과거를 통해 입신(立身), 국운을 회복해보고자 하였으나 점차 기울어져 가는 나라를 바라보며 이러한 의욕이 사라지고 벼슬에 대한 미련도 없어져 갔다.
이런 마음으로 서울에서 생활하던 큰할아버지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양대인(서양신부)이 명례방에 큰집을 짓는데, 대들보도 없이 벽만 올라간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명동성당 건축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호기심이 난 큰할아버지는 명례방에 올라갔다가 양대인을 접하게 된다. 양대인은 준수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 명례방 건설현장에 나타나자 말을 걸어보고 싶을 것이다. 한국어를 구사하는 양대인의 모습에 색다른 충격을 받은 큰할아버지는 이때 이 수염이 허연 양대인으로부터 단독으로 교리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아마 이 양대인은 프랑스에서 온 박 빅토르 신부였던 것 같다.
이렇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큰할아버지는 명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써 우리 집안 신앙의 시조가 된 것이다.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선산의 집으로 내려온 큰할아버지는 한동안 집안 어른들의 비난의 대상이 됐다. 『과거는 보지않고 「무부무군지도」(無父無君之道, 아버지도 임금도 알아보지 못한다?조선말기 천주교를 비하하는 말)를 배워왔다』는 비난에 시달렸으며 급기야는 문중회의의 「종손이지만 추방한다」는 결정에 따라 군위로 오게 된다. 큰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신자가된 우리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도 형을 따라 함께 군위에 정착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신앙활동을 시작한 3형제중 큰 할아버지는 군위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곳 「비들못」에, 우리 할아버지는 군위에서 5리 정도 되는 쇠골에, 또 작은 할아버지는 군위읍내에 각각 공소를 만들어 초대회장으로 교회발전에 한몫하게 된다.
이쯤에서 집안 이야기를 접고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우리 집은 내가 7살때 왜관으로 이사와 왜관성당 바로 밑에 거처를 잡았다. 성당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지 「그냥 성당에서 살았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매일 성당에 나갔으며 보통학교 입학하기전부터 아침미사 복사를 도맡아 담당했다. 아버지는 왜관본당 전교회장으로, 형은 문서보조를 하며 교회에 봉사하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온 식구가 성당 일에 나서고 있는 때였다.
아마 이때 나의 성소의 싹이 튼 것 같다. 손님신부가 집전하는 미사 복사도 내가 도맡아 담당할때였다. 당시 왜관본당 주임은 프랑스인 이동헌 신부(로베르또 리샤르?파리외방전교회)였는데 이신부는 복사를 서고나면 꼭 사제관으로 데려가서 버터바른 빵을 주곤 했다. 한번은 주임신부 미사 복사와 손님신부로 온 주재용 신부의 미사 복사를 하고 난 다음 여느때 처럼 사제관으로 가게 됐다. 두분은 한참동안 라틴어로 대화를 하다가 갑자기 주신부가 나를 쳐다보더니 『이 빵먹고 신학교 올래?』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물음에 망설임없이, 빵을 먹고 싶다는 욕심에 『예, 신학교에 가겠습니다』라고 답을 하고 말았다. 돌이켜생각해 보건대, 김이 먹고 싶어 신부가 됐다는 분도 계시지만 나는 버터바른 빵이 먹고 싶어 신부가 되고 말았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신부님께 한 약속」은 「하느님께 한 약속」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던 구교우 집안 아이인 나는 그때부터 머리속엔 「나는 신학교에 갈 사람」이라는 자의식이 충만하게 됐다.
보통학교 6학년때인 1940년, 우리 가족은 중국 만주의 해북진으로 이사를 갔다. 나는 잠시 그곳에서 생활하다가 1941년 4월 혼자서 귀국,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했다. 이로써 주재용 신부께 약속한 일의 첫단계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태평양 전쟁」이란 혼돈속에서 보낸 소신학교 시절은 「결핍과 굶주림과의 싸움의 과정」이라 여겨질만큼 힘이들었지만 어릴때부터 굳게 다져온 성소를 흔들정도의 위력은 없었다. 일제가 5년제였던 동성상업학교를 4년제로 변경함에 따라 나는 1945년 3월 23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