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학자에 의하면 노년기는 신체적 사회적 상실에 직면하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시기로 지나온 시간들을 회고 반성하면서 인생의 의미를 최종적으로 파악하여 자아통합을 이루는 것을 과제로 안게 되는 시기라 합니다. 여기서 자아 통합이란 말은 자신에게 일어났던 과거의 일들을 인정하고 용납하면서 지나온 삶에서 많은 것이 좋았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인데, 이러한 사람은 삶에 대한 통찰적 지혜를 갖게 되고 죽음을 위엄과 용기로 직면할 능력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이 위기를 넘지 못하면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절망의 느낌은 남은 시간이 없고 다른 인생을 시작하기엔 늦었다는 느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인생에 대해 무의미함을 느끼면서 자기 경멸을 경험하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 실망, 분노 때문에 삶을 돌아보기가 고통스럽고 자신의 부족과 결함을 외부세계로 투사하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라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무엇이 자기 통합과 절망이란 결과를 낳을까요? 노년기 이전의 삶이 문제라 합니다. 그 이전 단계에서 주어지는 위기와 갈등, 과제들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통과한 사람은 자기 통합에 이를 수 있는 반면 그 이전단계에서 주어지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 사람은 절망에 빠져 인생에 대해 초연하면서도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이론은 죽음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이 어떻게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는가를 보여 주면서 오늘 복음의 주제인 종말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이론입니다.
오늘 복음은 종말사건, 곧 인자의 내림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야기하는 종말사건에 대한 내용은 3가지입니다. 하나는 종말 직전에는 땅의 재난(마르 13, 5~13)과 성전 모독 사건(13, 14 ~23)에 이어 하늘의 이변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서 이러한 사건들이 종말의 전조이기에 종말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비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종말은 정확히 언제 어디서 도래 할지는 하느님만이 아시지만 예수님 시대 사람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도래한다는 임박한 종말론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실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과 분명한 차이가 있는 말씀이기에 해석하기가 쉽지 않고, 그러기에 혼란을 느끼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이 묵시문학의 영향 하에 쓰여졌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묵시문학에 대한 대강의 이해가 있다면 그 의미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습니다.
묵시 문학은 난세의 문학입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에서 미래 종말의 희망이라도 불어 넣고자 탄생한 문학이 묵시 문학입니다. 역사에 절망하고 종말 초월자에게 희망을 거는 희망의 문학입니다. 그러기에 묵시문학적 서술을 대할 때의 자세는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희망의 관점에서 대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역사적 사실의 기록으로 보기 보다는 신화라는 사실을 의식하고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화에서 사실과 과학적 지식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듯이 바로 종말에 대한 묵시문학적 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종말의 시간을 따지고 종말에 일어날 사건을 이야기하며 기만과 공포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종교들이 왜 사이비 종교일 수밖에 없는가! 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큰 뜻만을 보아야 합니다. 역사의 완성인 종말은 분명 있다는 사실, 그리고 종말의 주인공은 사람의 아들이요, 모르는 그날과 그 시간을 직면하기 위한 초연하고도 적극적인 삶이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얻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입니다.
오늘은 평신도 주일로 평신도의 사명과 역할에 대해 묵상합니다. 사실 우리 한국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역할이 미약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평신도들은 너무나 좋은 자원이기 때문입니다. 잠깐 눈을 돌려 우리 주위를 봅시다. 얼마나 많은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서와는 전혀 다른 열성과 적극성으로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기에 교회는 평신도의 역할과 사명을 촉구하기에 앞서 이러한 훌륭한 인적자원을 계발하고 활용할 의지가 있는지를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도자들은 평신도의 의무를 논하고 강요하기에 앞서, 그리고 교회 제도를 탓하기에 앞서 먼저 「평신도 권」을 인정하고 존중할 아량과 자질을 갖추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평신도권의 존중 여부가 어쩌면 오늘의 평신도 사도직 수행의 가장 직접적인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필자와 같은 교회 지도층의 반성이 필요한 이유를 오늘 묵상의 주제로 던져 봅니다.
말씀 안에서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