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교구 주보인 「들빛」지에 전교와 관련하여 『전교? 그 전에 이런 생각도』란 제목의 고정배 신부 글이 있어 좀 길지만 인용해본다.
『10월은 전교의 달이다. 매년 이맘때면 교회 신문, 주보, 강론 등을 통해 전교의 중요성과 이유가 강조되고 모범사례가 발표된다. 또 본당 신부들은 신자들에게 전교하라고 침이 마르도록 강요한다. 굳이 성서를 들이밀지 않더라도 그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답답하고 마음이 무겁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본당 여건이 비슷할 것이라 생각하고 주천 지역을 한 예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주천성당 (주천면, 수주면, 서면 일부)관할의 인구는 통틀어 8000명이다. 그런데 개신교가 대략 25곳, 절이 13곳, 천주교가 1곳이다. 무종교 또는 민간신앙에 의지하는 사람들 어림잡아 2000~3000명을 빼면 6000~5000명이 남는다. 1곳 당 평균 153~128명이다. 우리 나라의 종교인들을 다 합하면 전 국민의 숫자보다도 많다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다. 아파트 통로를 보면 한집 건너 한집씩 십자가가 붙어 있다. 그래서인지 신자들에게 전교 좀 하라고 하면 어김없이 들려오는 말이 있다.
『나올만한 사람들은 벌써 다 다니고 있어요』. 누가 개종이라도 하려고 하면 양쪽 다 난리가 난다. 서로 잘 낫다고, 서로 정통이라고, 이단이라고』
신부님의 푸념 : 『일년에 100명이 넘게 세례를 주었는데 미사 참석 숫자는 늘지를 않더라?』
신자들의 자랑 : 『본당이 분가해서 왕창 빠져나갔는데도 6개월 정도 지나니 다 채워지더라!』
결국 뭐가 문제인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본당 자체가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작은 그릇에 아무리 물을 부어봤자 조금 밖에 담아내지 못한다. 흘러 넘친 물은 땅에 버려지고 만다. 물론 여기서 그릇이 외형이나 규모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새 신자, 전입자, 냉담신자들을 끌어안을 수 있는 포용력(신자 개개인의 영적인 수준과 본당의 구조와 운영)의 문제다. 이런 포용력의 부재는 본당 안에서조차 경쟁, 차별과 소외, 독점과 기계화를 불러온다. 더 심하게 비유를 들면 「시궁창에 빠진 아이를 건져서 씻기고 입혀서 다시 시궁창에 밀어 넣는 것」과 같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한다.
『괜히 잘 있는 사람 건드려 놓고 세례의 짐만 무겁게 쥐어주다니 오히려 세례 안 받은 이만 못하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넘어 설 수 있겠는가?
대책없이 전교를 시작한다면 행방불명자와 냉담신자만 늘 것이고 이웃끼리 서로 불편해지기만 할 것이다.
특별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만 무거울 뿐이다. 다만 가능성을 본다면 손쉽고(사실 쉽지도 않지만) 금방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전교」보다는 어렵고 힘든 「교회쇄신」에 중점을 두고 싶다. 자신과 교회마저도 전교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스스로가 복음화 되도록 노력할 때, 오히려 세상을 향한 전교도 복음화도 힘을 얻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대미를 장식하는 부분으로 만민에게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도록 가르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이는 「세상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라는 명령인데, 이 말씀 때문에 「선교 사명」은 교회의 으뜸 사명이 되었던 것이고, 이를 위해 교회는 초대교회 때부터 피를 흘리면서까지 세상의 복음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교 주일을 지내면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은 「선교」 「전교」란 말마디 때문에 「복음화」(복음화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목과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교를 포괄하는 개념임)의 중요한 한 측면을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복음화의 사명은 「말씀」과 「삶」, 「사람」과 「현세 질서」, 그리고 「교회 안」과 「교회 밖」이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인데, 우리는 선교사명이란 말 때문에 너무나 자주 그 대상을 「사람」으로 한정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고, 또 밖을 향한 열정 때문에 교회 내의 복음화 문제에 눈감아 온 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전교주일을 지내면서 생각해보는 것은 복음화의 일차적인 대상이 「사람」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세 질서」도 선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과 특히 개신교를 중심으로 시작된 「교회와 성직자의 상업화」가 천주교 안에서도 진행되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비신자들과 사회 질서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활동 뿐 아니라 신자들과 교회 내의 구조 문제를 아우르는 쇄신과 복음화의 문제도 시급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말씀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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