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는 정규 대신학교 과정전에 고등과 2년과정을 거쳤는데, 이때 라틴어를 중점적으로 공부했으며 당시 대신학교 학장이던 장금구 신부님의 지시로 나와 백남익 몬시뇰은 월반(越班)하였다.
대신학교시절엔 서울 신학교 교지인 「알마 마떼르」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성당지기」(예절부)를 맡아 활동하며 내 나름대로 폭넓은 사제가 되기위한 소양을 갖추려 노력했다.
몸이 약했던 나는 철학과를 마치고 신학과 1학기 재학중 「폐병 1기」라는 진단을 받게 됐다. 장금구 학장신부님은 당시로선 큰 돈인 5000원을 내게 주며 『푹쉬고 다음 학기에 보자』고 말하며 격려해 주셨다.
인천 작은 할아버지와 주안 친척 누나집에 머물며 건강을 회복한 나는 6월 학기말 시험에 좋은 성적으로 통과했다. 1시간도 강의를 듣지 않았으나 요양을 하며 틈틈히 공부한 것이 효과를 본 것 같다.
돌이켜 보건대 당시 장금구 학장신부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 같다. 내가 사제가 되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특히 장신부님 은공이 잊혀지지 않는다. 「장신부님 덕분에 신부가 됐다」고 해도 지난친 말이 아닌 듯 하다.
1950년 4월 15일 시종품을 받은 후 얼마안돼 6?25가 터졌다. 발발 3일만에 학교가 문을 닫게 돼 왜관으로 내려왔으며 8월에 온 식구가 다시 밀양으로 피난가게 됐다.
일거리를 찾던 중 밀양에 주둔중이던 미 보병 2사단 군속으로 들어가 예수성심수도회 소속이던 군종신부의 통역을 맡게 됐다. 그런데 이 분이 프랑스계여서 불어도 곧잘 했다. 사실 나는 영어보다 불어가 나은 편이었기에 영어와 불어를 섞어가며 엉터리 통역사(?) 노릇을 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으로 2사단이 전주로 이동함에따라 나도 따라갔다가 사표를 내고 대구 주교관으로 돌아왔다.
당시 신학생이던 김수환 추기경은 대구에서 교구장 최덕홍 주교님의 일을 거들고 있었으며 나는 사무처장 장병화 신부님의 일을 거들었다.
최주교님은 『신학생들이 공부를 해야한다』며 교의신학과 윤리신학 강의도 해주셨다. 최주교님의 자상한 배려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1950년 11월경 서울 신학교가 다시 문을 연다고 신학생들을 불러모았으나 최주교님께서 김수환 신학생과 나, 두사람은 가지 마라고 지시해 가지 못하게 됐다.
그러던 중 1950년 12월 24일 최덕홍 주교님 주례로 대구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과 정삼규 몬시뇰 그리고 나, 세사람이 부제품을 받았다.
▲ 부제품때. 앉은 이가 최덕홍 주교, 뒷줄 왼쪽부터 정삼규 몬시뇰, 김수환 추기경, 정하권 몬시뇰
서울신학교에서 생활하던 신학생 50여명이 대구 주교관으로 와서 내가 신학생들을 뒷바라지하게 됐다.
그러다 51년 이른 봄 제주 서귀포에 임시 신학교를 개교한다는 연락이 와 당시 정삼규 부제는 제주도로 들어갔으나 김추기경과 나는 가지 않았다. 이 임시 신학교도 「공비사건」으로 인해 문을 닫고 부산 청학동으로 이전해야만 했다.
나는 1951년 9월 15일 대구주교좌 계산성당에서 최주교님 주례로 김추기경과 함께 대망의 사제품을 받게된다.
사제품을 받을 때 최주교님께서 『이제 우리 교구도 사목자가 40명이 됐다』며 좋아하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9월 16일 왜관본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한 후 성미카엘 대천사 축일(9월 21일)에, 비가 몹시 내리는 가운데 주교관 짚차로 사제로서 첫 사목지인 경남 창녕본당(현 마산교구)으로 향했다.
▲ 사제품을 받고 왜관성당에서 첫미사를 봉헌한 후 기념촬영했다. 제일 앞줄 가운데가 필자